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였던 마고 폰테인은 환갑이 넘도록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장수 커리어 뒤에는 사실 생활고가 숨어 있었다. 정치가인 남편 로베르토 아리아스는 적대 세력으로부터 총격을 당해 평생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하반신 불구였고, 그녀는 남편의 천문학적인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서야 했다.
45세에 뒤늦게 콤비를 이룬 19세 연하의 루돌프 누레예프와의 만남도 경제적인 위기에서 비롯됐다. 신예 댄서인 누레예프와의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를 그녀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풋내기 신인과 춤추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미 그녀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대작을 소화하기에는 체력적으로 한계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매니지먼트사는 그녀에 대한 지원을 삭감하겠다며 폰테인을 압박했고, 폰테인은 병원비 때문에 불가항력으로 무대에 올랐다. 다행히 이 무대의 성공은 전화위복이 되었고, 그녀는 누레예프라는 일생의 예술적 동반자를 얻었다.
폰테인의 사례는 극단적으로 예외적인 경우다. 발레는 신체를 극한으로 혹사시키는 직업이다. 아무리 관리를 잘 해도 나이가 들면 체력 감퇴 외에 척추측만증과 발가락 기형, 관절 파열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다. 발레를 위시한 무용가들이 불혹을 못 채우고 30대 전후에 은퇴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프랑스는 국립발레단 소속 무용수들을 ‘신체혹사 직업군’으로 분류해 42세 은퇴 이후 연금을 지급해왔다. 하지만 최근 마크롱 정부는 직종과 직능별로 42개에 달하는 퇴직연금 체제를 단일·표준화하는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발레단원들은 법적 정년인 62세까지 무대에 올라야 연금을 받게 된다. 즉 마고 폰테인만큼 춤을 춰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에 반발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지난해 말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단원들은 정기 공연을 취소하고 가르니에 극장 앞 야외 가설무대에서 ‘백조의 호수’ 중 일부를 상연하며 전국적인 시위 물결에 동참했다(국민일보 2019년 12월 25일자 12면 참조). 파리 국립오페라 노동조합 대표인 카르니아토는 “42세 정년은 우리가 무대 위에서 최고 수준의 공연을 보여주는 한계”라고 주장하며 연금 개정안에 따른 예술성의 저하를 우려했다.
카르니아토의 우려는 바로 한국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고령자고용촉진법 적용 이래 서울시무용단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 소속 시·도립 무용단체의 정년이 자동으로 환갑까지 연장되었기 때문이다(현행 정년 53세인 문화체육부 소속 국립무용단, 정년제가 없는 국립발레단은 제외).
2017년 전문 무용수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공립 무용단체 무용수의 은퇴 시기는 60대(32.5%)가 가장 많았다. 그만큼 국공립 무용단체의 고령화가 심각해졌다는 소리다. 신인들의 진입이 어려워져 이 분야의 청년 실업이 고질화되고, 고령자의 제한된 기량 때문에 작품 수준이 떨어져 결국 관객의 외면과 세금 낭비로 직결되고 있다. 이 같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전 등 일부 지자체는 명예퇴직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호응이 없어 거의 유명무실한 실정이다. 교육, 예술치료 등 시니어 무용수들에게 무대 밖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이 마련돼야 명퇴 제도가 실효를 거둘 것이다. 무용계에서 청년 실업 해결과 예술성 향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청년 일자리가 아닌 시니어 일자리 창출이다.
<음악 칼럼니스트·숙명여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