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군 휴가를 이틀 남겨둔 여름날, 일병이던 난 동갑내기 선임과 함께 영내 병원에 격리됐다. 부산 해운대로 휴가를 다녀온 대구 출신 동기가 “행님아, 내 머리 아프다”며 골골대더니 ‘신종플루’ 확진자로 판명 났고, 이내 질병은 나를 포함한 소대원들 사이에 퍼졌다. 40도 가깝던 열이 가라앉은 뒤 격리된 병실에서 선임과 본 건 아이러니하게도 전염병이 창궐한 미래를 다룬 영화 ‘28주 후’였다.

일과시간에 TV시청은 원칙상 금지였다. 하지만 병실을 살피러 들어오려는 군의관이 아무도 없었던 덕분에 우리는 간섭 없이 웃고 떠들며 영화를 봤다. 주인공을 향해 달려드는 감염자 무리를 보며, 지금 밖의 군의관들도 우리를 저들처럼 여길 거라 농담했던 기억이 난다. 격리 전 우리의 체온을 잰 군의관은 벌레라도 지나간 양 앉았던 자리에 소독제를 연신 뿌려댔다. 의무병은 끼니마다 눈 한번 마주치지 않은 채 식판을 병실 앞에 놓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순간들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신종 코로나)을 피해 지난달 31일 김포공항에 귀국한 중국 우한 교민 일행을 지켜보며 10여년 전 기억이 살아났다. 현장에서 후배가 전해온 보고에는 오랜만에 찾은 고국 땅에 반가워하는 표정도 있었지만, 그보단 취재진의 시선을 피해 높이 눌러썼다는 마스크가 마음에 박혔다. 한 교민은 자신들을 향해 격리시설 지역 사람들이 트랙터까지 동원해 반대 시위를 해왔던 걸 알고 있다며 걱정했다.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전염병이 창궐할 때 정부가 먼저 하는 일은 감염자를 격리하는 작업이다. 극 중에서는 대개 이 격리벽이 뚫리며 위기가 시작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없이 반복된 플롯임에도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좀비물(zombie films)’이라는 하나의 장르로 분류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 극에 묘사된, 통제가 붕괴되는 상황이 관객들 마음속 근원적 공포를 건드려서라고 짐작한다.

격리는 의학적인 이유에서 전염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지만, 공포까지 완벽히 막아서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감염자들을 둘러싼 통제 어디엔가 구멍이 있을 것이고, 언제라도 무너질 거라 믿는다. 실제로 이 같은 기대에 부합하는 사건이 부분적으로라도 일어나면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공포가 확산되는 과정은 이성보다는 감정의 영역에 가깝기에, 이에 반하는 객관적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한번 커지기 시작한 것을 잠재우기 어렵다.

이렇게 커진 공포는 거꾸로 ‘사회적 격리’, 곧 혐오와 차별로 쉽게 이어진다. 이미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중국 국적자뿐 아니라 아시아 인종 전체를 향해 신종 코로나를 들먹이며 손가락질하고 따돌리는 등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중국 국적자를 향한 혐오발언은 현실에서건 온라인에서건 넘쳐난다.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질 법한, 중국 동포 거주지의 비위생적인 모습을 강조해 묘사한 몇몇 언론 보도는 악의적이기까지 했다.

감염자나 그 접촉자, 혹은 의심증상자를 물리적으로 격리하는 일은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일이지만, 병이 전염될 의학적 가능성을 차단하는 작업이기에 최소한의 정당성이 있다. 현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길 요청하는 우리 교민을 귀국시키는 것 역시 응당 정부가 해야 할 작업이다. 거론되듯이 정부가 일부 중국인 관광객을 입국 금지하는 데까지 나아간다고 해도, 실제 전염 가능성이 상당하다면야 필요한 조치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도록 통제하는 게 정부의 임무이듯, 사회적 질병을 옮기는 공포가 확산되지 않게 하는 것 역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다. 엉성한 행정을 벌여 상황이 통제되고 있다는 신뢰를 깎아먹는다면 이는 그러잖아도 사회에 깔려있는 공포가 번지도록 자극하는 꼴이 된다. 부풀려진 공포는 질병을 막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외려 혐오와 차별이라는 사회적 질병의 씨앗이 될 뿐이다.

진실된 정보보다는 관심받는 정보가 무섭도록 빠르게 퍼지는 시대다. 때문에 정부의 책임은 과거보다 무겁고 어렵다. 그런 책임에 비춘다면, 우리 정부가 중국과의 전세기 협의가 완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교민 귀국 계획을 공표했다가 부랴부랴 이를 뒤집은 건 칭찬받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하고 신뢰를 주는 정부가 필요한 시기다.

조효석 사회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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