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세계 영화산업의 심장부인 할리우드에서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작품상까지 4관왕을 휩쓸며 역사를 새로 쓴 날. 의문의 여성 한 명이 무대 위에서 한껏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주인공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었다.
이 부회장은 이날 작품상 발표 후 무대에 올라 유창한 영어로 “봉 감독에게 감사하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 그의 미소, 머리, 그가 말하고 걷는 방식, 특히 그가 연출하는 방식과 유머 감각을 좋아한다”고 봉 감독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어 ‘기생충’ 제작진과 동생 이재현 CJ 회장에게도 고마움을 전한 뒤 “한국영화를 보러 가주시는 관객들에게 감사하다. 관객들의 의견 덕에 많은 감독과 창작자들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의 소감을 끝으로 시상식이 마무리되자 일부 팬들은 의아해했다. 정작 주인공인 봉 감독이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을 제치고 제작사 대표가 먼저 발언하는 건 아카데미상의 오랜 관례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지난해 작품상 수상작인 ‘그린북’과 2018년 ‘셰이프 오브 워터’, 2017년 ‘문라이트’, 2016년 ‘스포트라이트’의 수상 소감도 모두 감독에 앞서 제작자들이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서도 제작사인 바른손 이앤에이 곽신애 대표가 먼저 마이크를 잡고, 이 부회장이 이어받았다.
업계에서는 책임프로듀서(CP)로 참여한 이 부회장이 이번 쾌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CJ E&M은 바른손이앤에이와 125억원 규모의 투자계약을 체결하고, 영화 배급도 맡았으며, 100억원에 달하는 홍보비용을 지원했다.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 8000여명의 투표를 거치는 아카데미상 특성상 회원들을 상대로 한 영화 홍보는 결정적이다.
CJ 관계자는 “국내 대기업들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문화 사업에 대한 투자를 줄였는데 CJ는 꾸준히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과 제작자와 함께 영화를 만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정진영 이택현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