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정문을 나서다가 순간 멍해졌다. 도로 양옆 매화나무가 피워 올린 소담스러운 봄꽃이 생경했다. 꽃샘추위에, 더 서늘한 코로나 시국에, 이미 온 계절을 뒤늦게 마주한 주말 출근길이었다.
올해는 ‘봄 탄다’고 투정부리기도 전에 ‘코로나 블루(코로나 우울증)’가 한발 앞서 왔다. 영유아나 노약자가 있는 가정에는 “어디 안 가고 집에 잘 계시냐”는 멘트가 안부 인사를 대체한 지 오래다. 청장년이라고 다를 건 없다. 게임과 스트리밍서비스, IPTV 등 슬기로운 격리생활을 위한 혼자놀기 콘텐츠가 대세다.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 전에 없이 늘어난 중년 부부들 사이에선 때아닌 가정불화가 심심찮게 화제에 오른다.
우울한 범사회적 격리는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22일부터 다음 달 5일까지 보름간 모임·외식·행사·여행 자제와 종교시설, 일부 실내체육시설, 유흥시설 운영 중단 등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고했다. 안 그래도 협소한 동선이 더더욱 단출해지게 됐다.
그럼에도 일상은 멈추지 않는다. 사태 초반 재택근무를 권장했던 회사들이 필수업무와 효율성을 이유로 슬슬 반강제적 출근을 권유하는 분위기다. 대공황의 서막을 연상케 하는 각종 지표에 불경기로 당장 기업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이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다만 일상 속 거리두기와 생업의 연결고리, 양쪽의 암영만 강요된다는 생각에 입맛이 쓰다.
이런 고민조차 상대적으로 그나마 사정이 괜찮다는 방증이다. 코로나는 직장인들에게 ‘직업 안정성의 격차’라는 우울한 현실마저 환기시켰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고민은 대기업, 전문직과 달리 선택의 여지마저 불투명한 여건의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들에겐 배부른 궁리에 가깝다. 나아가 자영업자들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는 재난과 마주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나 홀로 생존은 불가능하기에 ‘창궐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사회와 관계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다. ‘이 시국에 경조사’가 최대 고민으로 떠올랐듯 일상 속 관계의 경중을 재고, 고립과 연결 사이에서 매 순간 선택을 강요당하며 피로는 누적되고 있다. 이는 국가 차원으로 시각을 넓혀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는 사태 초기 중국 등 외부와의 관계를 고려해 봉쇄를 마다했다가 신천지라는 예기치 않은 암초를 만나 뭇매를 맞았다. 역으로 국내 감염이 폭증할 때 우리 하늘길을 막는 다수 국가로부터 연결을 차단당하며 감염과 공포 앞에 냉정한 국제사회 현실과 직면하기도 했다. 불명확한 옳고 그름과 지향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통시적 혼란, 연일 엇갈리고 뒤바뀌는 평가는 당국과 국민 모두에 고민과 시사점을 안겼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유럽은 이미 누적 사망자 수가 진원지 중국의 2배를 넘어섰다. 국지전에서 팬데믹으로 확산하는 동안 짐짓 뒷짐 지고 있던 미국도 확진자가 단시간 2만명을 넘어서며 안방에 불이 번졌다. 아직 걸음마 수준인 각국의 대처와 봉쇄국면 장기화, 그로 인한 미증유의 공포가 되려 확산세가 잦아든 우리를 역습할 개연성이 크다.
‘사피엔스’의 저자로 유명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코로나 위기와 관련해) 각 정부는 대응 과정에서 전체주의적 감시와 시민권한의 확대, 국수주의적 고립과 글로벌 연대 사이에서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중국과 달리 정보 공개 및 시민 협조를 통해 감염 확산을 저지한 성공 사례로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등을 들기도 했다. 뭐 그런들 먼저 맞은 우리라고 인류가 맞닥뜨린 선택의 기로에서 예외일 리 있을까. 단절이 아닌 인간적 거리두기, 분열이 아닌 연대의 적정선, 코로나가 좀먹은 국제사회의 집단적 마비 앞에서 올 한 해는 우울한 선택지를 누차 마주하게 될 것 같다.
정건희 미션영상부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