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법이 희한하게 바뀌더니 정치가 더 희한해졌다. 비례정당 위성정당 플랫폼정당 같은 생소한 용어와 함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정치판이 활짝 열렸다. 자고 나면 뚝딱 정당이 생기고 의원들이 순간이동 하듯 당적을 옮긴다. 후보등록이 코앞인데 어떤 당은 대표와 공천위원을 싹 갈아치웠고, 다른 당은 듣도 보도 못한 이들이 홀연히 나타나 비례 순번 앞자리를 지분 챙기듯 가져가게 됐다. 재미는 있다. 어떤 막장을 상상해도 그 이상을 보여주니까. 이런 뉴스를 키득거리며 읽는데 어느 순간 슬며시 기분이 나빠졌다. 몇 해 전 고위 공무원이 “민중은 개돼지”라고 했을 때의 막연한 불쾌감과 비슷했던 것 같다. 이 기분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선 정치판에서 최근 벌어진 일을 잠시 복기해야 했다.
미래통합당은 설마를 현실로 빚어냈다. 지난해 12월 비례정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할 때만 해도 선거법 개정을 막기 위한 위협인 줄 알았는데 한 달 만에 미래한국당이 생겼다. 꼼수, 가짜, 페이퍼 정당이란 비난이 쏟아져도 꿈쩍 않는 뚝심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사람들은 “정치가 장난이냐. 우리는 그런 짓 안 한다”고 했다. 애당초 그들의 말에 가공할 무게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뒤집어버릴 줄은 몰랐다. 다시 한 달 만에 더불어시민당이 등장했다.
비례정당에 의원을 파견해 바지사장으로 앉힌다는 통합당의 발상은 무척 놀라웠는데, 바지 역할을 못 한다고 하루아침에 다른 바지로 갈아치울 줄은 정말 몰랐다. 민망한 그 자리를 신속히 채워내는 바지사장 인재풀의 넉넉함이 더욱 놀랍다. 의원 꿔준 과정이 불법이라며 고발했던 민주당은 요즘 더불어시민당에 꿔줄 의원을 모으고 있다. 자신들이 했던 고발은 잘못됐다고 시인하는 건지, 고발당할 위험을 무릅쓴 도박인지 알 길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실패해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패자부활의 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는데, 선거판은 그렇게 됐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열린민주당 후보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집을 팔아 기부한 그의 결단은 실패한 투자로 막을 내릴 뻔했다. 정봉주씨 같은 비슷한 패자들이 선거법 틈새를 비집고 기회를 창출한 덕에 금배지에 성큼 다가섰다. “민주당과 큰 바다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멋진 말도 했다. 민주당 후보는 아닌데 그렇다고 딱 잘라서 아니라 하기도 어색한, 절묘한 파생상품의 입지를 확보했다.
비난을 무릅쓰고, 민망함을 감수하고, 뻔뻔함을 드러내면서 정치권이 벌이는 이 모든 일은 한 가지 근거를 토대로 돌아가고 있다. 그들은 시뮬레이션을 했다. 여론조사 지지율을 준연동형 비례제의 공식에 대입했다. 통합당은 25석을 얻는다는 시뮬레이션 결과에 비난을 무릅쓰고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민주당은 17~19석을 가져온다는 계산에서 민망함을 삼키며 말을 뒤집었다. 열린민주당은 지지율을 공식에 넣으면 6석이 나온다니 패자부활 기회로 꽤 괜찮다고 여겼을 것이다.
기분이 나쁜 것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유권자들이 시뮬레이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전제가 이 난장판의 배경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꼼수를 쓰든, 바지를 앉히든, 선거법 취지를 내팽개치든, 3분짜리 면접으로 후보를 공천하든, 유권자는 자신들이 깔아놓는 판에서 펄럭이는 깃발에 따라 우르르 몰려다닐 거라고 생각한다. 편법을 썼다가 표심이 돌아서면 어쩌나, 말을 바꾸면 역풍이 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저들에겐 없다. 그러니 설득하려 들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유권자가 이렇게 철저히 무시당하는 선거판을 보지 못했다. 민중은 개돼지라는 영화 대사와 무엇이 다른가.
태원준 편집국 부국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