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를 훌쩍 넘긴 이강명 목사는 나이가 무색하게 지금도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있다. 남강교회 협동목사로 시무하면서 민족복음화운동본부 여성부총재, 한울타리선교협의회 대회장 등을 맡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 목사는 2014년 교단 역사상 처음으로 예장피어선 첫 여성 총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는 이 목사의 하나님의 종이라는 확고한 사명감 때문이다. 목사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일에 앞장서서 자신부터 본을 보이겠다는 마음으로 임할 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 목사의 마음은 오로지 선교의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의 오지에서도 연락이 오면 서슴없이 나갈 준비를 한다. 1년에 대여섯번은 자비량으로 해외선교를 나간다. 국내 부흥회에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 휠체어를 타고 해외 부흥회에 갔다가 거뜬하게 걸어서 돌아오는 체험도 여러번 했다.
이 목사는 남편 장로의 사업으로 여러 교회를 개척했고, 지금도 남편은 열심히 선교에 동참하고 있다 .
이 목사에게 있어서 선교는 스스로 서원한 사명이었다. 치리자의 사명이 아니라 세우고 일으키는 선지자적인 부흥사의 사역을 감당하겠다고 했다. 이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세계만방에 선포하고 싶어서 자비량으로 세계 100여개 나라를 다니며 선교했다.
지금은 필리핀 빈민촌과 마약촌에서 밥퍼 사역에 동참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역하겠다는 각오를 갖고 있다.
이 목사는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전도도 안 받고 스스로 여의도순복음교회 금요철야예배에 나간 것이 계기가 됐다. 그때 친구 집사가 신약 성경을 읽으라고 했다. 이후 몸이 아파 병실에서 성경책을 읽다가 간절한 마음에 성경책을 가슴에 올려놓았다. 그런 어느 날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약의 내용이 영화의 장면처럼 보이는 환상을 체험했다. 만약 친구가 구약도 읽으라고 했으면 구약도 환상으로 볼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 이전에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 이 목사는 수술중 희한한 체험을 했다. 정신을 잃고 있던 중 어디선가 들리는 “이것이 나의 찬양이요 이것이 간증이요”라는 노래에 깨어났다. 나중에 교회에 갔을 때 이 노래가 찬양이었다는 것을 알고 ‘아!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부르고 계셨구나’하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알게 됐다.
그러다 몸이 아파도 주의 일을 안 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 아픈 몸이라 어쩔 수 없이 힘들게 기도원도 가고 금식도 했다. 그러다 오산리기도원에서 금식 중 걸어가는데 최자실 목사가 부르더니 신학을 하라고 권유했다.
그길로 곧장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과연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당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주님을 더 알고 싶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신학을 공부하는 중에 하나님은 벼락같은 음성을 통해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의 종의 사명을 감당하게 됐다.
이 목사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돼 친가 시댁 모두 다 교회로 전도해 집안에 여러명의 장로와 목회자가 세워지는 것을 보았다. 또한 지인 500명 이상을 전도할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닌, 내가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전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들이 태어나던 해에는 꿈속에서 겟세마네 동산의 십자가 앞 예수님의 기도 모습을 환상 중에 보기도 했다. 어느 주일에는 아들이 기어와서 내 몸에 손을 대는데 갑자기 방언이 터져 나왔다. 그 체험과 예수의 십자가 피 흘리는 고통과 환상을 보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환상과 병 고침 등 체험했다.
경기도 군포에서 교회개척을 하고 6년간 사례비도 없이 열심히 목회에 집중했다. 교회는 기대 이상으로 부흥했다. 그러다 다른 목사에게 교회를 주고 가방 하나를 갖고 나왔다. 일본 선교를 하게 됐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본 선교를 하면서 숱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좀 쉬려고 하는 중 민족복음화운동본부 총재인 이태희 목사가 여성운동본부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때부터 또 다른 사역에 매진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