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은 예수님이 신자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하신 복의 선언이다. 많은 경우에 팔복을 조건, 혹은 명령으로 이해한다. 즉,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하며, 온유한 자가 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러나 사실은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원어의 의미는 정반대이다. 오히려 예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띠며 “너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팔복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복’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마카리오이’가 형용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신자가 이렇게 살면 장차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원의 의미가 아니라, 현재 너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라는 선언이다.
영어 성경도 “Blessed are…”로 복을 받은 자임이 먼저 나오고 상태도 현재형이다. 이 말은 ‘앞으로 너희는 이런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너희의 상태가 이미 복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전해 주신 팔복은 신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 강령 혹은 조건이나 명령이 아니라, 현재 신자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예쁘구나’라고 말을 시작하면, 그것은 그 사람을 향한 감탄의 뜻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팔복의 문을 열며 형용사인 ‘마카리오이’라고 한 것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을 바라보며 ‘복이 있도다, 복스럽구나~’라고 한 감탄의 말이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팔복을 번역하면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이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그렇다. 팔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해서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는 감탄사이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 모두를 끌어안으시며 ‘너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동일한 사상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도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사, 신령한 복을 ‘이미’ 주셨다고 이야기한다(엡 1:3~4).
이 선언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위로를 주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었던 그들은 이미 가난하고, 애통하며, 하나님의 의에 주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첫 선언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아, 애통하는 자들아,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인 것을 아느냐’라고 깜짝 놀랄 선언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팔복을 이해하는 핵심 키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이다. 이 팔복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라든가, 공덕과는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복이 조건이기 때문에 반드시 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과 수양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팔복이 우리에게 훨씬 더 소중한 이유는, 이 팔복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마음과 영혼이 피폐해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복되다’ 하시며, 삶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표현되어 있다. 이로 인해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감동과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것, 이것이 팔복이다.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