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의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로 번역된 말이 헬라어로 ‘프토코스’다. 이 말은 ‘극빈자, 산산이 부서진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물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과 영혼이 가난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그를 의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하다는 말 자체가 실제적으로 돈과 그다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부자와 가난을 구분하는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의 구분은 물질의 소유 여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마음에 있다.
현재 물질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 가진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다. 반면에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로 인해 비교되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자아가 부서진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 한계와 불가능을 깨달은 자다. 이 땅을 살면서 자신이 가진 물질로도, 명예로도, 사람으로도, 권세로도 행복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심령의 가난은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 행복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나 자신에 대하여 깊은 영혼의 탄식을 하는 상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무(無) 사상이나 유교에서 말하는 덕(德)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죄 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실히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이것은 내가 무언가를 결심하고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팔복에서 말하는 ‘심령의 가난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겸손,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도덕적 겸양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터져 나오는 자기 부정이기 때문이다.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가. 여기까지, 바로 이 끝을 경험한 자만이 내 영혼의 깊숙한 외침으로 ‘나에게는 예수가 필요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백은 단순히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읊조림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정말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음을 잘 아는 사람이 외치는 간절함이다.
사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심령이 가난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는 다르다. 그들에 비하면 물질적 풍요로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하지 않다.
그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복을 온전히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이 자리로 끌고 가겠다는 선언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만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빨리 항복해야 한다. 그것이 팔복의 복을 온전히 누리는 열쇠다.
이수용 목사(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