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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잘 가요, 박정희



적당히 고급함을 과시하는 한정식 집이었다.

“우린 아직 박정희와 싸우고 있는 중이고, 이제 겨우 승리의 기세를 잡았을 뿐이지요.”

그는 용자이다. 박정희 유신정부, 전두환 군사정부, 이명박과 박근혜 부패정부에 맞서 왔다. 그가 내놓은 21대 총선 결과에 대한 평가는 미래통합당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확인시켜주었다.

정치인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정치 자산은 유지된다. 18년간이나 집권했던 독재자 박정희의 정치 자산은 워낙 막대해 박정희의 부하, 박정희 부하의 친구, 박정희 부하 친구의 협력자, 박정희의 정신적 후계자, 그리고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을 하도록 만들었다. 마침내 박정희의 정치 자산은 박정희 딸 박근혜의 탄핵으로 바닥을 드러낼 때가 된 듯도 하고, 이번 총선에서 그 조짐을 보았다고 그 용자는 말했다.

종업원이 조선궁중음식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음식을 상에 놓았다. 용자는 종업원의 말이 진실인지 내게 물었으나 역사적 사실 논쟁을 할 것이 아니니 농담으로 받고 말았다.

“조선 임금님은 부침개도 먹고 물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 이 부침개는 궁중부침개이고 여기 이 물도 궁중물이지요.”

광복 이후 민주공화정이 시작됐어도 왕정의 그림자가 곳곳에 스미어 있었다. 이승만은 왕처럼 행동했다. 경무대 안에서 옥체, 수라 등의 궁중 언어로 이승만을 떠받들었다. 조선궁중음식을 국민 앞에 등장시킨 것은 박정희였다. 1970년 조선궁중음식을 대한민국 무형문화재로 지정했고, 1974년 미국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왔을 때 청와대에서 조선궁중음식으로 만찬을 차렸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후 왕정의 궁중음식이 공화정 대한민국 정부 행사에 등장하는 일이 ‘전통’이 됐다.

지구의 거의 모든 국가는 예전에 왕국이었고, 그래서 몇몇 국가는 자국의 전통문화로 왕가 음식을 내세우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프랑스가 그렇다. 프랑스 음식의 전통이 왕가 요리에 있음을 그들은 자랑한다. 그런데 프랑스는 그 음식을 먹었던 왕가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다. 그 음식의 영광을 요리사에게 돌린다. 한국에서는 궁중음식을 먹었던 왕가에 강조점을 둔다. 왕이 먹었던 음식을 대통령도 먹는다는 상징조작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용자 앞에서 조선궁중음식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정치 자산에 궁중음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이래 끊이지 않았던 민주화 투쟁과 시민의식 성숙에 대해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요리를 다 먹고 마지막에 몇 가지의 찬과 함께 밥이 나왔다. 한때 상차림에서 공간전개형이 한국 전통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요즘은 다들 서양식 상차림이라는 시간전개형으로 바꾸었다. 그때그때 조리해 내어야 맛있다는 ‘조리학의 대원칙’ 앞에 전통 논쟁은 의미가 없다. 밥은 ‘스텡’ 공기에 담겼다. 뚜껑을 여니 밥이 꾹꾹 눌러져 있다. 미리 밥을 해서 스텡 공기에 담아 온장고에 넣어둔 것이다.

“박정희가 남긴 것 중에 모질기로는 스텡 공기만 한 게 없지요. 지름 105㎜에 높이 60㎜. 한국 밥그릇 ‘표준 규격’입니다. 쌀 자급률을 올리는 게 과제였고, 식당에서 먹는 밥의 양을 줄여서라도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지요. 이 밥그릇을 쓰지 않으면 1차 위반은 1개월 영업정지, 2차 위반은 허가취소였습니다. 쌀이 부족했으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세상은 바뀌어 쌀이 남아돌고 있는데, 이 볼품 없고 밥맛 떨어뜨리는 밥그릇을 아직도 우리 밥상 위에 두고 있는 것이 아쉽지요, 많이 아쉽지요.”

국그릇 위에서 스텡 공기를 뒤집어 흔들어도 밥이 떨어지지 않았다. 밥그릇이 줄었어도 ‘밥심’을 넉넉하게 채워야 한다는 한국인의 마음은 변한 적이 없다. 용자와 나는 떡진 밥을 국에 풀며 주문하듯 말했다.

“잘 가요, 박정희.”

황교익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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