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다. 성경적 의미의 청결이란 무엇인가. 본문에 등장하는 ‘청결’은 헬라어로 ‘카다로스’이다. 이 말은 율법적 의미로 ‘깨끗하다고 선언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깨끗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청결은 ‘깨끗하다고 누군가로부터 선언된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율법에 따르면 인간이 깨끗함을 입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죽어야 한다.(히 9:22) 그렇기에 구약에서는 나 대신, 소나 염소를 잡아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드려야 했던 제사가 필요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단 한 번의 제사로 자기 피를 바쳐 우리를 깨끗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자가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다.
이 같은 이유로 팔복에서 말하는 ‘청결’을 예수님의 보혈의 피와 상관없이 해석하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가 되기에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정결함은 다른 종교가 말하는 수양이나 수행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만이 나를 정결하게 한다. 우리의 깨끗함은 내 행위가 아닌, 예수의 대속의 죽음만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하셨는데 사실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했기에 그것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보는 것을 왜 예수님은 복이라 하셨을까. 이 ‘본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쓰인 ‘본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라오’이다. 이 단어는 ‘본다’ 외에도 ‘알다’라는 뜻이 있다. 영어에도 ‘알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노우(know)와 씨(see)가 있다. 두 단어의 용도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know’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할 때이며, ‘see’는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용된다.
헬라어에 노우(know)에 해당하는 말이 ‘기노스코’이고, 씨(see)에 해당하는 단어가 오늘 본문의 ‘호라오’이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이전까지 너희가 알던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지만,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 함께하는 하나님, 나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는 희생의 하나님으로 함께하게 된다는 축복의 선언이 새롭게 선포되는 복이다.
팔복은 복의 조건이 아니다. 예수님이 신자들을 향한 복의 선언이다. 이미 예수를 믿는 제자들에게 한 선언이다. 그렇기에 본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복이 있도다. 마음이 청결한 자요.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선언한 것은 그들이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대속의 구원자로 인정하고 그 앞에 나와 있는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정결함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요 14:8~9)
그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자들이다. 그 피를 통해 정결케 되었음을 마음으로 믿는 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선포된 팔복의 은혜다.
이수용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