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란 한 사회의 맥락에서 통용되는 어떤 개념을 다른 사회의 것으로 대체하는 작업이다. 이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건 그만큼 각 언어를 쓰는 사회가 다르다는 뜻이다. 언어란 의식을 나타내는 수단이기에, 둘의 차이는 두 사회 구성원들 의식의 간극을 드러낸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일이 상식에 가까운지를 가늠하고 싶을 때, 대학 시절 번역을 공부한 나는 이를 영어로 옮겨보는 습관이 있다. 한국만의 맥락 때문에 들어맞는 어휘를 찾기 힘든 경우가 있는가 하면, 기계적으로 가져다 쓰는 번역어의 개념이 뒤틀린 경우도 있다.
근래의 예가 ‘여성혐오’, 즉 미소지니(misogyny)라는 개념이다. 작고한 번역·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이 생전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이라는 글에서 설명했듯, 미소지니는 서구에서 “여자를 남성입문의 발판으로, 구원의 여인상으로, 다른 세계의 안내자로 특화해 여자를 삶에서 배제시키려는 모든 환상과 편견”을 뜻한다. 하지만 언론에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등장하자 많은 이는 이를 한자어대로의 ‘혐오(嫌惡)’, 즉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과거 문학에서 라틴어 어원을 따라 기계적으로 옮긴 번역어가 현대까지 그대로 쓰인 결과다.
당시 “난 여자를 좋아하는데 왜 ‘혐오’를 한다고 손가락질하느냐”던 이들의 억울함은 상당수 이 오해와 무관하지 않았다. 비슷한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이 서구라고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21세기 들어 이를 두고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소동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두 사회의 일상에서 같은 개념을 향한 이해의 깊이가 그만큼 다르다는 의미다. 때문에 한국에서 여성혐오란 단어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영어로 옮기려면 두 사회 맥락의 차이를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꽤 긴 사족이 필요하다.
이른바 ‘공정(公正)’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을 보며 다시 오래된 습관을 떠올렸다. 공정을 직역한 영단어 ‘페어니스(fairness)’의 영어사전 정의는 “편견이나 불의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나 조건”이다. 옥스퍼드 사전은 같은 단어를 “사람들을 동등하거나 합리적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연일 방송과 신문 지면마다 ‘공정을 향한 청년층의 분노’라며 인용되는 취업준비생과 공공기관 정규직들의 화는 이른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향해 있다. 정규직 입사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자격도 없는 이들이 정규직과 같은 조건의 직장을 얻어선 안 된다는 주장이 먼저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이들은 이렇게 정규직화된 비정규직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느라 쓰인 자원 때문에 새 공공기관 일자리가 줄어들고, 이는 자신들에게 손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번역어는 공정보다는 프리라이드(free ride), 즉 ‘무임승차’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이 가상의 ‘흑인 복지여왕’을 비난한 것과 종류가 같다. 딴 데 쓰일 재원 탓에 자신이 손해를 본다는 발상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흑인 복지여왕이 복지정책을 비난하려 고안해낸 허구였듯, ‘인천공항 연봉 5000만원 보안검색원’ 역시 가상의 존재다. 실제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 대부분은 공공기관의 자회사 소속이다. 설사 직고용되더라도 기존 정규직과 다른 직군으로 분류돼 현격히 다른 보수를 받는다. 이들이 ‘무임승차’해 새로 얻는 건 그간 못 누린 노동자로서의 기본권뿐이다.
역사에서 무임승차론은 경제불황의 시기에 등장했다. 내게 돌아올 몫이 남지 않을 것이라는, 혹은 현재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란 불안은 보다 열악한 처지의 사람들이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조차 반대하게 한다. ‘정규직 입사시험’이라는 공정의 기준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며, 이를 섣불리 ‘공정을 향한 열망’으로 부르는 식자들의 행태는 외려 젊은층이 처한 불행을 고의로 외면하는 지적 게으름에 가깝다. 이번 일을 다른 사회의 독자가 이해하게 하려면, 아마도 나의 번역에는 또다시 아주 긴 사족이 붙어야 할 것만 같다.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