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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칼럼] 볼턴 회고록이 가르쳐준 것들



사실·해석·주장 얽힌 내용을 전제로 국정조사 하는 건
어리석은 일… 외교안보에 정파적 이익은 배제해야

선의 가득한 대북 전략 약점 적확하게 찔러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냉엄함을 인식케 한 게 성과라면 성과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의 힘은 해군력이었다. 15~16세기 유럽 대륙 최대 강국이었던 에스파냐(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1588년)한 게 영국이 제국으로 부상하는 기점이다. 무적함대와의 해전에 영국 함대의 실질적 사령관은 프랜시스 드레이크였다. 그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공인된 해적의 대장이었다. 당시 스페인 상선을 사략(私掠)질 해 얻은 이익을 국가와 나눠 먹는 구조였다. 이 수익은 전체 국가 수입의 10~15%에 해당할 정도였다(‘제국의 품격’ 박지향). 그러니 조국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는 의식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행위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해적 드레이크 처벌을 요구하고 이행하지 않으면 영국을 공격하겠다고 경고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오히려 그에게 기사 작위를 주고 격려했다. 이후 양국의 종교 갈등과 메리 1세 처형 사건이 겹쳐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보낸다. 무적함대를 깨부순 뒤 사략질을 하던 해적은 해군으로 발전했고, 드레이크는 지금까지 넬슨 제독과 함께 영국 해군의 상징적 인물로 남아 있다.

국가 이익에는 해적이고 해군이고 없었던 셈이다.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이익을 취하느냐 마느냐 같은 추한 모습이 장막 뒤에 있었다.

19세기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는 유럽 강대국 사이에서 교묘하게 수완을 발휘한 외교술의 천재로 기록된다. 1870년 7월, 비스마르크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로 프로이센 주재 프랑스 대사와 프로이센 빌헬름 1세가 주고받은 전문을 조작해 공표한다. 정중한 태도였는데도 모욕적 언사를 주고받았다고 바꾼 것이다. 이미 갈등이 고조된 상태였던 베를린과 파리였다.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보불전쟁이 벌어졌고,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통일을 이루게 된다. 국가 이익을 위해서라면 전쟁 촉발 의도의 정부 문건 조작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의 회고록이 지난주 발간됐다. 한국 관련 부분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하며,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해야 하는 걸 숙명으로 여기는 네오콘이다. 네오콘에겐 힘이 곧 정의로 간주된다. 회고록에는 한반도 정책에서 한국의 생각은 그리 중요치 않게 여기는 그의 생각이 배어 있는 듯하다. 북·미 관계나 남북 관계가 좋아지는 게 미국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고, ‘한반도 문제는 역시 아베하고 함께 논의해 보는 게 맞아’라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을 동맹이라기보다는 협상 대상, 미국 이익을 위한 활용 도구쯤으로 여긴다는 추측마저 들게 한다.

미국과 한국의 이익이 일치할 순 없다. 그렇게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양쪽의 조율로 서로 국익을 취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뿐이다. 그 국익을 최대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미국과 동맹을 맺고, 중국과 등지지 않으려는 것이다. 회고록은 볼턴의 주장, 상황 인식, 정황에 대한 해석 등 주관적인 생각이 사실과 얽혀 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기정사실로 해 무엇을 주장하는 것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회고록을 읽는 이들은 사실과 그의 해석을 구별하고 ‘볼턴이 그 상황을 그렇게 생각했다’는 정도의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회고록 내용을 전제로 일부 정치권이 국정조사 운운하는 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정말 심각하게 짚어볼 사안이 있다면 국회 비공개 청문회로 하면 된다. ‘모든 정파적 싸움은 국경선에서 멈춘다’는 반덴버그 선언은 우리 정치에 너무 절실하다.

볼턴은 한국 외교 실력도 얕잡아 봤다. 이런 대접을 받을 정도로 외교·안보 전략에 레버리지가 없다는 건 슬프다. 아직도 선의가 외교에서 통한다고 믿는 것일까. 현 정권이 3년 동안 북·미 사이에서 온갖 굴욕을 참은 결과가 이것이라면 뭔가 심각하게 고칠 게 있다는 뜻이다. 외교에서 국익보다 우선하는 건 없다. 장막 뒤에선 추잡하고 비열한 음모가 횡행해도 무대 위에선 포장을 한다. 포장도 힘이 있어야 근사하게 하고, 포장 실력이 외교력일 게다.

볼턴의 회고록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외교·안보 현실과 실력이 어디쯤 있는지 적확히 지적해줬다. 그가 회고록으로 돈은 많이 벌겠지만, 우리에겐 ‘선한 의도가 좋은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막스 베버의 현실감 있는 지적을 새삼 인식시켜준 게 성과라면 성과다.

편집인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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