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이 한 명 등장한다. 한 드라크마는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다. 그렇게 큰돈이 아님에도 여인은 밤늦은 시간까지 찾고 또 찾는다. 이 여인에게 이 동전의 가치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안타까워하며 늦은 밤까지 수고하는가.
그것은 이 여인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었다고 한 데서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여인들이 결혼할 때에는 아버지가 결혼 지참금으로 ‘열 드라크마’를 주고는 했다. 즉 이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대표하는 물건이다.
만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이 동전은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유물이 된다.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으며, 그것 아니면 안 되는 유일성을 지닌 물건. 그것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동전처럼 ‘너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너 한 사람의 가치와 존재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얘기다.
왜 우리가 소중한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다른 사람과 구분하고 선택해 지키고 돌보셨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도, 내버려 두지도 않으신다는 그 마음의 표현이 오늘의 비유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양,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는 서로 비슷하다. 하지만 드라크마 비유는 다른 두 비유와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다른 두 비유는 자기 의지로 안 좋은 곳으로 갔다. 양도, 탕자도 자기 스스로 있는 곳을 떠났다. 그래서 이 둘은 스스로 힘으로 무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동전은 다르다. 동전은 자기가 무리를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도 아니고, 어둡고 칙칙하고 먼지 나는 곳이 좋아 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는 그곳에 남겨져 있는데 스스로 빠져나올 방법이 전혀 없다. 누군가 해야 한다. 누군가 그 냄새 나고 어둡고 먼지 쌓여 있는 곳에 찾아와야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치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오늘 이 땅을 사는 사람 중에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은 죄가 없는데 부모가 전과자라 어릴 때부터 죄인 취급을 당하고 살고 있다. 처참한 가난도 대물림받는다. 어떤 사람은 분명히 영적으로 어두운 환경 속에 있는데 본인은 모를 뿐 아니라, 빛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는 외롭고 고독한 절망의 상태. 그것이 지금 어딘가 떨어져 있는 한 드라크마의 상태이다.
그런 그 동전이 어떻게 다시 빛으로 나오게 됐는가. 여인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여인이 빛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냄새나는 곳까지 바짝 엎드려 더럽고 먼지 많은 곳으로 찾아가는 희생을 감수했기에 동전은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스스로 힘으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던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자신의 모습이 망가지고 더러워지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찾아내시는 그 모습, 바로 그 여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도 이 일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광스러운 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우리에게, “너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야”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온몸에 먼지를 두르고 상처 난 몸으로 다가와,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 잃어버린 자리로 돌아오라고. 그 음성에 항복하자. 그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본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