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사람을 감싸는 초록의 힘을 믿는 책이라고 소개됐던 ‘오늘도 초록’은 세미콜론에서 론칭한 띵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음식 에세이라는 평범한 분류에 인생의 ‘띵’ 하는 순간이라는 정서적 분류를 더했다. 앞서 출간된 책으로 ‘조식: 아침을 먹다가 생각한 것들’과 ‘해장음식: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이 있다.
사람들이 뭔가를 대단히 좋아할 때 발생하는 무논리의 논리를 읽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에너지, 그러니까 초록의 힘을 주는 일인지 알아가는 게 꽤나 즐겁다.
“돌마데스를 간절히 생각했더니 돌마데스가 응답해 주었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거의 돌마데스로 접시를 채웠다.” 터키 음식점에서 돌마데스를 발견한 저자가 유레카를 외치며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이 근본 없는 논리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를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하겠다. 좋아하는 것 앞에서 이성의 끈 따위 모르는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건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아닐까. 띵 하는 순간은 논리가 무용해지는, 논리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겠다.
띵 시리즈와 함께 나의 최애 시리즈는 후마니타스에서 출간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논리’였다. 안성기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진 ‘부러진 화살’이나 폐광 광부, 구로공단 노동자, 에어컨 수리 기사, 이주 노동자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쓸쓸한 풍경을 보여 주는 ‘웅크린 말들’, 장애 1급 자폐아인 아들과 함께 2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3000㎞를 걸었던 장애인 활동가 이진섭 씨의 이야기 ‘우리 균도’ 등은 또 다른 의미에서 언제나 나를 띵 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초록’이 사람을 감싸는 초록의 힘을 믿게 하는 책이라면 ‘임계장 이야기’는 초록의 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신록의 초록, 생명의 초록, 젊음의 초록…. 저자는 ‘신의 직장’이라 불리던 공기업에서 정규직으로 38년 동안 일하다가 퇴직 후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한 노인 노동자다. 임시 계약직 노인장. 줄여서 임계장. 올해로 임계장 4년 차인 저자가 들려주는 극한의 노동 일지는 시외버스 배차원, 오래된 아파트의 경비원, 빌딩 경비원, 터미널 보안 요원 등 여러 궂은일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시간을 담담하게 보여 준다.
“나는 38년 직장 생활을 통해 조직과 상사에 충성을 다하도록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퇴직 후 경비원을 시작하고 제일 처음 한 일이 스마트폰을 없애고 통화만 가능한 핸드폰으로 바꾼 것이었다. 경비 업무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취침 시간에도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경비복은 항상 입고 잤다.” 하지만 열심과 무관하게 노동자는 언제든지 새로 구할 수 있는 소모품이었고 일터는 별수 없이 노역장이었다.
‘임계장 이야기’는 어느 날 일터를 찾은 후배에게 보여 준 수첩이 계기가 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말이니 쉽게 하지만 책을 출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자신이 보내고 있는 하루하루의 노동이 그가 시달리고 있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학대를 묘사하고 있을 때 그걸 읽고 마음 아파 할 가족들을 생각하면 출간은 더더욱 망설여졌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이 문장을 읽고 나면 얼마나 어렵게 이 책이 우리 앞에 도착했는지 알 수 있다.
“가족에게 부탁이 있다. 이 글은 이 땅의 늙은 어머니, 아버지들, 수많은 임계장들의 이야기를 나의 노동 일지로 대신 전해 보고자 쓴 것이니 책을 읽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마음 아파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10여년을 아파트 경비원으로 살았던 할아버지가 떠올라 자꾸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아픈 마음보다는 이런 글을 책으로 출간하기로 결심해 준 저자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훨씬 컸다. 저자가 책을 출간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우리 시대의 논리 시리즈 책들 영향도 컸다고 들었다. “생명이 위협받는 일터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읽은 저자가 나눌 수 없는 서로의 고단함에 말 없는 위로를 보내고 싶었을 거라는 짐작도 틀리진 않을 것 같다.
“뼈마디와 근육이 튼튼”하지 않은 60대 이상 고령층이 살아가는 인생 2막의 풍경에 깃든 비인간적 대우, 부당한 갑질, 육체적 고통, 정신적 학대에 대한 서글픈 풍경들은 여기 다 옮겨 적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옮기지 못한 그 말들의 기록을 읽은 마음들이 빚어낼 연대의 논리가 우리 시대를 조금은 더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초록의 기운을 담아 읊조려 본다.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