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 26일 미국의 젊은 뮤지컬 작곡·작사가 조나단 라슨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가 쓴 작품이 뉴욕에서 첫 정식 공연을 앞두고 있어서 그는 오랫동안 생계를 위해 일하던 레스토랑 웨이터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이제 생계형 노무자에서 36살에서야 자신의 예술적 결과물로 인정받는 인생을 막 출발한 아티스트는 대동맥 박리라는 희귀한 병에 스러져갔다.
그 날은 뮤지컬 ‘렌트’가 초연을 앞둔 오프브로드웨이의 소극장 뉴욕시어터워크숍(99석)의 드레스리허설 아침이었다. 수개월간 연습한 젊은 신인 배우들이 관객을 만나기 직전이었는데, 그 작품을 건네준 사람이 세상에 없었다. 배우들은 눈물을 삼키며 노래했고 미친 듯 연기했으며, 그 에너지는 다음날 개막 공연에서 객석으로 고스란히 전달됐다. 신화의 시작이었다.
평단과 관객의 찬사가 빗발친 ‘렌트’는 퓰리처상을 비롯 토니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 해 4월 29일 브로드웨이 큰 극장으로 옮겨져서 12년을 넘게 공연했고, 그 후에도 전세계 투어 및 라이선스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마침 현재 서울 디큐브시어터에서 한국 공연 20주년 ‘렌트’가 성황리에 이어가는 중이다.
작품 창조자를 잃은 슬픔을 비롯해 작품 사실 작품 속 캐릭터들의 삶과도 일치한다. ‘렌트’의 주제는 주변을 돌아보고 약자들을 서로 사랑하라는 휴머니즘의 메시지이다. 플롯과 캐릭터는 오페라 ‘라보엠’에서 가져왔고 형식은 공동체 생활을 중시하는 1960년대 히피문화에서 가져왔다. 1960년대 ‘헤어’가 당시 부모와의 세대갈등, 베트남 반전 시위 등 젊은이들의 문제를 다소 상징적이고 관념적으로 다뤘다면 1990년대 ‘렌트’는 예술가의 가난한 삶, 세입자 갈등, 동성애, 마약, AIDS, 홈리스 등 2020년 현재에도 통용되는 고통과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특히, 두 작품에서 부모 캐릭터가 대비된다. ‘헤어’가 부모를 기성세대로서 갈등의 축으로 보고 적대감을 표출했다면 ‘렌트’는 사랑하지만 함께 있기엔 버거운 존재로 그렸다. ‘렌트’에서 부모는 장면 전환 장면에서 전화기 너머 존재로 등장한다. 자식들의 삶을 걱정하면서도 개입하지 않고 멀리서 응원하는 진보적 아젠다를 보여준다.
깨어있는 부모 세대는 사실 ‘헤어’ 세대, 이른바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945년 2차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 초반 출생률이 급격히 높아진 시기가 베이비 붐 세대였는데 이들 연령대가 바로 ‘헤어’의 관객이자 ‘렌트’ 속 캐릭터들의 부모이자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맞붙은 앨 고어와 조지 W. 부시이기도 했다.
‘렌트’의 주요 넘버인 ‘네가 가진 것(What You Own)’에는 물가 비싸고 경쟁이 심한 뉴욕을 떠나 서부 산타페에 가서 살고자 하는 미국 젊은이들의 꿈과 애환이 담겨있다.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고어와 공화당 부시는 ‘렌트’의 젊은이들의 진보적 가치와 부모들의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각각 내세웠고, 결과는 민주당의 클린턴 집권 8년을 끝낸 보수 공화당의 재집권이었다. ‘렌트’를 만들어낸 미국 젊은이들은 지금 중년이 됐다. 그리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거쳐 ‘렌트’ 초연 20주년이었던 2016년에는 도널트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트럼프는 재선이 열리는 올해에 미국 우선주의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공언 중이다.
‘헤어’가 내세운 공동체 히피즘이 현실에 뿌리내리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추억이 ‘렌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통령으로 부시를 뽑았듯이 이제 그 자식 세대인 ‘렌트’의 젊은이들이 부모가 되어가는 이때 현재 그 자식 세대인 미국 젊은이들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까?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시작된 경제 침체가 코로나로 가속화되는 이 시기에 그들은 다시 한 번 미국 우선주의를 선택할까?
세기가 바뀌는 불안과 희망의 밀레니엄을 앞두고 자신의 모든 바람을 담은 ‘What you own’의 노랫말을 썼던 조나단 라슨이 현재의 미국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진다.
조용신 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