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삼상 22:1)
이 말씀을 통해 혼자 동굴로 들어가라는 내용을 묵상해 보자. 다윗의 삶을 보면 다윗의 인격과 신앙 성장을 질적으로 분리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아둘람 굴이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아둘람 굴에 들어가기 전 기도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도 기도를 하지 않았다.
블레셋에 속한 가드에 갈 때도 문짝에 기대 침까지 흘려가며 미치광이인 척해 목숨을 구걸했지만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던 다윗에게 기도의 문이 열린다. 아둘람 굴에 들어갔다 나온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여러 질문을 한다.
“하나님, 나가서 싸워야 할 때인가요. 하나님, 용기를 주셔서 저들을 이기게 해 주시겠습니까.”
다윗에게 아둘람 굴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한순간에 그를 기도의 사람으로 변모시켰을까.
다윗이 홀로 자신을 직면한 공간이 바로 아둘람 굴이었다. 혼자인 다윗이 드디어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한 곳이 바로 굴이었다. 그곳에서 자신과 씨름하면서 몸부림쳤었다.
아둘람 굴은 다윗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시켰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났고 또 대화했다. 일생 묻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다.
가장 추한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한다. 아름다운 사람은 언제든 혼자 있을 수 있다. 믿음과 신념이 확고한 사람은 홀로 있어도 늘 빛이 난다.
적지 않은 사람이 고독을 받아들이더라도 모두가 성숙의 열매를 맺는 건 아니다. 오히려 고독한 곳에서 은밀한 욕망을 몰래 실현하려는 게 인간의 민낯이다. 남들과 같이 있을 때 많은 사람은 주변을 의식해 거짓되고 포장된 행동과 말을 한다. 그러다 혼자가 된 순간 아무도 보지 않으니 누르고 있던 욕망의 찌꺼기를 모두 털어 댄다. 게을러지고, 때론 음흉한 욕망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부류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추해진다. 그리고 연약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자기 파괴의 시간이 되고 만다. 홀로 있되 잘 있어야 한다.
하루를 살다 보면 수많은 더러운 것들이 묻어 더러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흙탕물처럼 혼탁한 것도 언젠가는 맑아진다. 바로 가만히 내버려 둘 때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두면 부유물이 다 가라앉고 맑은 물이 드러난다.
그럴 때는 참모습이 드러난다. 흐트러졌던 마음도 마찬가지다. 혼자 있는 그 순간 복잡한 마음이 가지런해진다. 자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순간 성숙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독은 그래서 선물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하시려는 선물이다. 아둘람의 어두운 굴에서 다윗의 영혼은 오히려 빛났다. 홀로 있는 고통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됐다. 삶이 변화하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혼자된다는 것은 외로움 속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그 안에 밝게 빛나는 우리의 모습, 실존이 담겨 있다. 홀로 있는 시간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단독자로 세우신다.
고독이라는 선물을 피하면 안 된다. 거절해서도 안 된다. 혼자되는 걸 피하고자 또 다른 것들에 집착하고 의지하려는 마음의 욕심을 끊어버려야 한다.
우리 모두는 고독 속에서도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고독 속에서 여러분의 빛나는 실존을 찾길 권한다. 또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길 바란다.
이창우 박사(선한목자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