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분들을 뵙는 자리에서 작품의 주제를 다루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이따금 자신의 짐작이 맞는지 묻는 분도 계신다. 그때마다 그 말씀도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얼버무리곤 했다. 작품을 읽고 뻗어나갈 상상력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생각과는 달리 질문자의 표정은 한쪽으로 일그러지기 일쑤였다. 글쓰기에 비슷한 질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소설을 쓸 때 좋은 소재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건 마치 좋은 요리 재료를 묻는 것처럼 들렸다. 음식에 따라, 먹는 사람에 따라 좋은 재료가 다르듯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머뭇거리던 나는 문득 언젠가 지나가던 학생이 친구에게 던졌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 이번에 문학 100점 받았어!” 문학에 매겨진 점수에 걸음을 멈췄다. 이내 나의 학창시절에 주어졌던 점수가 얼마였는지 따져봤다. 그러고 보면 이제껏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문학을 다뤄 왔다.
최근 문학 관련 기관을 통해 문학상담소를 진행하고 있다. 내달 초쯤엔 문학상에서 응모자들의 글쓰기를 도와주기 위해 운영하는 게시판도 맡을 예정이다. 비슷한 성격의 자리마다 번번이 놀라곤 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읽기와 쓰기에 어려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성인이나 어르신들도 제법 많다. 음악이나 미술은 학원이라도 있어 배우기 쉽지만 문학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논술학원이 있지만 문학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고 입시 준비에 초점을 맞춘 곳이 많아 아쉽다고도 한다.
문학을 둘러싼 이야기를 이어가다보면 어렸을 때 알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 때가 잦다.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문학은 면밀히 읽고 주제를 정확히 파악해 정답을 맞히는 것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낮은 국가지만 문해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하위권에 머무는 이유도, 갈수록 문학에 대한 흥미가 줄어드는 이유도 이쯤 숨어 있지 않을까.
우리가 본격적으로 문학을 접하는 순간은 교육과정일 때가 많을 것이다. 이때 점수를 매겨야 하는 과정과 맞물리면서 문학적 상상력은 단순히 맞고 틀린 것으로 재단되기 쉽다. 그래서 상상력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적 편견만을 심어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느낄 때가 있다. 책을 읽는 이유가 질문을 던지거나 폭넓은 간접체험을 위해서가 아닌 그저 시험에 나오기 때문이라면 문학을 대하는 방식을 다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교과서에 나온 문학작품을 시작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살펴봐야 하는데 교과서가 한 사람이 평생 접하는 문학의 전부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문학작품을 읽고 자기 생각대로 쓴 주제가 오답으로 규정된 학생에게 “틀린 주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것일 뿐”이라고 한 적이 있다. 울상이었던 표정은 얼마간 나아지는 듯했지만 온전히 밝아지진 않았다. 그래서 십여 년 전 신문 칼럼에서 한 시인이 자신의 시로 만든 시험문제를 틀렸다고 밝힌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글쓰기마저 공식과 이론에 끼워 맞추는 과정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이론을 응용하고 부정해야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생각까지 오래 걸리기도 한다. 2006년 발표된 김애란 단편소설 ‘침이 고인다’에는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획일적으로 쓴 아이들이 나온다. 어쩌면 우리는 그 시간으로부터 한 발짝도 떼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에도 글과 관련된 고민을 나눴다. 오래전 글을 읽고 쓰는 게 막막해 웅크리기만 했던 나를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해줄까. 막막한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온기처럼 덧대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쯤 고민에 대한 대답도 얼마간 유연해졌다. 그러다 보면 사실 그때의 나에게도 누군가가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전해줬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다를 뿐이지 틀리지 않았다는 지지와 응원의 목소리. 어쩌면 이제 막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결심한 누군가에게 간절하게 필요할 그 목소리가 널리 퍼지길 바란다.
전석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