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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강청함의 비유(2)



이 본문은 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에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소원을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됐다. 8절에서 사용된 ‘강청함’(개역한글)이란 단어를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말하다’로 해석했기에 이를 근거로 ‘강청 기도’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그렇기에 강청 기도의 자세는 ‘무리가 되더라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발전해서 ‘기도는 양을 채워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끈질기게 쉬지 않고 하는 모든 기도는 다 이루어졌는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기도에도 임계점이 있다는 발상이 나왔다.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열심히 기도했는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기도의 임계점을 못 채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 역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만일 기도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어떤 기도는 24시간짜리 양이 있어서 1시간씩 기도하면 24일 걸리고, 꼬박 안 자고 기도하면 하루면 응답이 온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로 이 기도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천사가 금향로에 기도를 담아 올라가는 내용을 근거 삼는다.(계 8장) 하지만 그 본문도 기도의 양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성도의 기도가 합해져서 양을 이룬다는 협력의 뜻이지, 개인 기도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의 양이나, 자세나 끈기를 고려하여 기도 응답 가부를 결정하지 않으신다. 물론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할 때에 훈련의 차원으로 그 방향으로 인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기도 응답의 핵심이 아니다.

만일 우리의 소원 여부가 내 열심과 양에 의해 결정된다면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항상 떼를 쓰고, 매달리고 포기하지 않으면 들어주시는 존재로 인지돼 결코 건강한 신앙으로 자라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강청’이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한 것에서 생긴 일이다. 이 강청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나이데이아’다. 이것은 떼쓴다, 끈질기게 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뻔뻔스럽다’ ‘염치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 관계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사람만 드릴 수 있는 ‘뻔뻔한 기도’를 의미한다.

본문의 빵을 요구하는 친구를 보라. 그는 여러 번 요구했다는 말 자체가 없다. 그저 와서 한번 얘기했다. 떼를 쓴 것도 아니고,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요구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요구하는 상황 자체가 너무나 뻔뻔스럽다. 밤중에 왔고 자기 손님을 위한 것이며, 친구는 잠자리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사람을 엄청 귀찮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와서 빵을 달라 하는 것은 정말 뻔뻔스런 행동이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이 뻔뻔함을 잘 표현한 인물이 야곱이다. 야곱은 자기애가 강한 인물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을 의지하고 사기를 쳐가며 자기 유익을 위해 물불을 안 가렸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이 치셨다. 이로 인해 그의 환도뼈가 부러졌다. 그는 그때 어떻게 반응했는가. 일반적으로는 회개한다. 하지만 그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 요구한다.

이게 바로 강청함이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기도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거기서 야곱을 축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뻔뻔스러운 요구, ‘강청’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할 때 우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이수용 목사(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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