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갈 때마다 자꾸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아내가 된 송점옥씨였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수도통합병원에 근무하며 밤에는 대학에 다니던 맹렬여성이었다. 아내는 1등을 도맡아 하던 모범생이었고, 나는 각종 시위에 빠지지 않던 ‘데모 수석’이었다. 나와는 참 달랐던 사람이었다.
아내를 향한 마음이 커지면서 기도가 절로 나왔다. 물론 상대방의 마음도 사야 했다. 연애가 익숙하지 않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몰랐다. 기도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 김칫국물을 마신 것이었다. 모범생 아내가 데모만 하는 신학생을 좋아할 리 없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우선 남학생들을 모았다. “점옥이와 나는 연애할 거다. 너희들 넘보지 말아라.” 일생 누구를 힘으로 괴롭힌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둔 사람을 넘보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내가 무술 유단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던 때였다. 다행히 넘본 사람은 없었다.
고백도 했다. “점옥씨,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벌벌 떨며 말했지만, 답은 없었다. 점점 어색한 관계가 됐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자세로 구애를 시작했다. 요즘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가능했다. 오기가 생겨 더 열심히 따라다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점옥씨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길게 연애할 마음은 없었다. 서둘러 결혼하고 싶었다. 아내가 출근한 시간을 노려 화곡동 집으로 찾아갔다.
“저는 점옥씨 친구 정성진이라고 합니다. 함께 신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나는 장인과 장모님이 될 어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족한 게 많지만, 책임감은 강합니다. 사랑만 주고 살겠습니다. 점옥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눈도 뜨지 못한 채 쏟아내듯 말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식사하고 가게.” 기도의 응답처럼 느껴졌다. 밥맛이 좋았다. 차도 얻어 마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철컥.”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옥씨가 들어왔다. 집에 내가 있는 걸 보고 눈만 깜빡이며 말을 잇지 못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결국, 나는 아내보다 장인, 장모님께 먼저 프러포즈를 한 셈이었다.
그날 저녁, 그렇게 결혼 허락을 받았다.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혼식은 1983년 12월 3일에 했다.
내가 금왕교회에서 사역하는 2년 동안은 주말부부로 지냈다. 아내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회사생활을 했고 주말에만 금왕에 왔다.
시외버스를 타고 금왕에 도착해도 3㎞를 더 들어와야 했다.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던 노선버스를 우연히 만나면 좀 편히 올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 시골길을 걸어야 했다. 아내는 불평하지 않고 매주 금왕교회에 딸린, 다 쓰러져 가는 사택으로 왔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