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으로 두부쌈이나 해볼까?” 내 말에 가족들은 당황한 듯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먹어본 적이 없어 그러나?’ 하던 찰나 아이가 긴장하며 물었다. “부부싸움을 한다고요?” 당황한 내가 TV의 두부쌈 광고를 가리키자 그제야 모두 깔깔 웃기 시작했다. ‘두부쌈’이 ‘부부쌈’으로 들렸던 것이다.
치료자들의 주간 회의 시간. 그날은 어떤 치료에도 난공불락의 상황이 반복되는 어느 가족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제는 제일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며 한 명이 한숨을 쉬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진단이나 치료를 떠나 이 집에서 제일 심각한 문제는 집안에 웃음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순간 모두 “맞네, 맞아!”라며 박수를 쳤다. 비단 이 가족뿐 아니라 치료가 잘 안 되는 가정의 아이들은 치료실에서나마 잠시 천진하게 웃을 뿐 가족 모두 밖에서나 남을 대할 때에도 무표정하거나 진지하고 심각하다. 더 걱정되는 경우는 온 가족은 굳어 있건만 어느 한 명만 자기만의 유머 또는 다른 가족을 비웃는 유머를 즐기는 집인데, 이 경우 치료의 길이 더 험해진다.
때로 ‘유머’란 권력이기도 하다. 상관의 불쾌한 농담에 웃는 척하기도 어려웠던 적이 있을 것이다. 다 웃어주니 ‘나는 참 좋은 상사’라 생각하고, 설령 맞장구를 못 치면 ‘웃자고 하는 말에 정색한다’는 핀잔을 한다. 이런 상사들의 착각은, 관리자 말고는 쉽게 유머라는 도구를 꺼내기조차 어려운 경직된 조직구조를 간과한 탓이다. 지치고 힘들 때 바쁘다며 옆에 있어주지 않다가 불쑥 맥락 없는 유머로 웃음을 강요하는 부모의 생각 역시 아이들과 동상이몽인 것처럼.
정신과학에서 유머란 상당한 뇌기능의 산물인 동시에 참 좋은 방어기제인지라 어려운 시기일수록 서로를 배려하는 따듯한 유머가 함께하는 사회를 기다리게 된다. 힘든 상황에서도 건강한 웃음을 나누는 가족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함께했으니 말이다.
배승민 의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