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을 썰다가 식칼이 무디어진 것을 알았다. 가정에서 흔히 쓰는 식칼은 스테인리스가 대부분이다. 처음 구입했을 때는 기분 좋을 정도로 잘 들지만 금방 날이 무디어지고 만다. 질긴 식품을 썰기도 어렵고 자칫 손을 다칠 수도 있다. 숫돌에 문질러도 잘 갈리지 않는다. 그래서 멀쩡한 칼을 두고 또 새로 사게 된다.
전에 산청에서 산 무쇠칼이 생각났다. 녹이 슬고 비위생적이라 하여 쓰지 않고 찬장 깊이 넣어 두었었다. 칼날에 약간의 녹이 슬어 있었지만 숫돌에 물을 부어가면서 날을 세웠다. 칼등의 녹도 말끔히 갈아냈다. 종이가 경쾌하게 잘릴 정도로 날이 섰다. ‘맞아 이게 바로 무쇠칼이지.’ 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산청 시장 구경을 하는데 보기 어려운 대장간을 만났다. 대장장이 노인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부인이 풀무질하고. 석탄불이 이글거리는 아궁이에서 달군 쇠를 꺼내 두드려 만드는 식칼. 그는 두드리고 물에 식히기를 반복하여 맨 마지막에는 나무 손잡이에 꽂았다. 그리고 칼날에 손가락을 대보더니 만족한 듯 가게 앞 판매대에 다른 연장들과 함께 진열했다. 아직도 이렇게 무쇠를 두드려 칼을 만드는 곳이 있다니. 먼저 믿음이 갔다. 바로 수제가 아닌가.
광고 많이 하는 제품을 좋은 물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유명 업체 제품을 명품이라며 백화점 할인 판매 때 줄을 잇는다. 명품이란 소수 구매자가 장인에게 주문하여 한 사람을 위해 손으로 만드는 물건을 말한다. 대장장이가 쇠를 두드려 만드는 연장이 바로 수제이다. 수제를 만드는 장인이 곧 국가산업의 씨앗이 되고 첨단과학 제품을 만드는 기술력의 바탕이 된다. 주문 제작하는 동네 구둣방, 양복점, 양장점이 사라진 오늘, 그 기술마저 사라지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다. 잘 드는 식칼을 들고 이 연장을 만든 대장장이의 건강을 빌어본다. 그의 기술이 녹슬지 않고 영원하기를.
오병훈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