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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맬런의 교훈



1909년 6월 30일 미국 뉴욕의 지방신문인 ‘뉴욕 아메리칸’에 한 삽화가 실렸다. 네 명의 경찰관이 한 여성을 붙잡아 구급차에 강제로 태우는 장면이었다. 경찰에 붙잡힌 사람은 38세의 메리 맬런이었다. 언론은 그를 ‘장티푸스 메리’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에서는 장티푸스가 창궐했는데, 그해에만 장티푸스 사망자가 3만명에 육박했다. 요리사였던 맬런은 자신이 장티푸스균 보균자란 사실을 몰랐다. ‘무증상’ 보균자였기 때문이다. 병원에 격리 수용된 그녀는 “나는 건강한데 왜 병원에 갇혀야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뉴욕타임스는 1면에 그녀의 사연을 다뤘는데, 독자들은 ‘보건 당국이 생사람을 잡는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바이러스나 세균에 대한 지식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다. 맬런은 연방법원에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호소했다. 결국 그는 요리사 일을 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보건 당국에 근황을 보고한다는 조건으로 퇴원했다.

하지만 맬런은 ‘메리 브라운’으로 개명한 뒤 맨해튼의 한 병원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이곳의 의사와 간호사 등 20여명이 장티푸스에 걸렸고, 이 가운데 2명이 숨졌다. 같이 근무하던 하녀는 농담조로 “혹시 당신이 ‘장티푸스 메리’가 아니냐”고 말을 건넸는데, 화들짝 놀란 맬런은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결국 다시 붙잡힌 맬런은 죽을 때까지 23년간 병원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다. 사망 뒤 부검을 했는데, 쓸개에서 장티푸스균이 검출됐다.

코로나19 사태로 다시 오르내리는 맬런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곱씹게 만든다. 맬런은 왜 전문가의 경고를 무시했을까. 그에게 감염된 이는 공식적으로 51명, 사망자는 3명이다. 이름을 바꿔 여러 곳을 전전하며 일한 정황을 감안하면 피해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감염되고, 사망자까지 나온 사실을 알면서도 치료를 거부했다. 오히려 자신은 ‘의사들이 꾸며낸 음모의 희생양’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보건 당국의 처사는 적절했을까. 당시 당국의 감독을 받던 장티푸스 보균자는 200명이 넘었지만 맬런처럼 여생을 격리당한 환자는 없었다. 그가 첫 번째 붙잡혔을 때는 외딴 섬에 갇혀 지내기도 했다. 맬런의 일대기를 다룬 책 ‘위험한 요리사 메리’ 등에 따르면 언론과 대중은 그를 ‘인간 장티푸스균’ ‘마녀’ 등으로 지칭하면서 비난의 선봉에 섰다. 피해자이면서 환자였던 그를 마치 가해자 취급하며 희생양처럼 삼기도 했다.

다시 치열해진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100여년 전 ‘맬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재확산의 진원으로 꼽히는 광화문 집회 참석자들 가운데 일부가 여전히 검사를 거부하고 있다. 거짓말로 자신의 동선이나 증상을 숨겨 지역 사회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특히 ‘어디에서 확진자가 또 발생했다’ ‘누가 확진됐다’는 소식마다 그 주어가 교회, 목사, 신도들이어서 더욱 안타깝다.

기독교는 공동선의 종교다. 공동선은 개인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를 위한 선을 강조한다. 이웃 사랑과 다를 바 없다. 정치색을 벗어나 공동선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내 가족과 이웃을 살린다는 심정으로 방역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비록 서구에 비해 짧은 역사의 한국 기독교이지만, 고비 고비마다 복음의 가치로 나누고 베풀며 ‘우는 자와 함께 울어주던’ 종교가 아니었던가. 나아가 코로나가 한국의 기독교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드는 반면교사가 되길 바란다. 고생하는 보건 당국과 언론도 피해자이자 환자인 확진자를 자칫 가해자처럼 취급하지는 않는지 시시때때로 돌아볼 일이다. 맬런이 주는 교훈이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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