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서울 광성교회에 전임전도사로 부임했다. 그해 5월 교회가 속한 서울동남노회 봄 노회 때 목사안수를 받기로 돼 있었다. 목사가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무엇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나를 감쌌다. 좋은 목사가 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노회가 열리는 장소가 B교회로 정해진 것이었다. 88년 장로회신학대 재정 문제의 핵심 인물이던 재단 A사무국장이 장로로 시무하던 교회였다.
그 장로를 체포하겠다고 교회로 쳐들어갔을 때 나는 체포조장이었다. 앞장서서 한 집사와 드잡이까지 했었다. 하필 그 집사도 그사이 장로가 됐다. 그들이 날 잊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일이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회 사무실 간사에게 연락이 왔다.
“전도사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지금 전도사님 같은 사람에게는 목사안수를 줘서는 안 된다고들 하시는데…. 지금 노회 사무실로 좀 오셔야겠어요.”
할 말이 없었다. 그때는 정의라고 생각했던 일이 시간이 흘러 내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칼이 돼 돌아왔다. ‘교계가 이렇게 좁구나.’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노회 사무실에서 총무 목사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노회 임원들이 목사안수자 명단을 검토하다 그 교회 장로 한 분이 전도사님을 지목하며 ‘이렇게 과격한 사람에게 목사안수를 줘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몇 분이 그 의견에 동조하시면서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교회를 직접 방문해서 해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석고대죄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다. 목사 안수식이 열리기 직전 주일 저녁, B교회 당회가 열렸다. 회의실에 찾아가 무조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성실한 목사가 되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오늘 이 순간 잊지 않고 겸손하게 목회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빌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 자리에서 용서받지 못하면 목사안수가 정말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혼날 걸 각오하고 갔다. 하지만 담임목사님과 장로님들은 나를 탓하지 않으셨다.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계셨을 두 분 장로님 마음도 편치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도 모두 목회 잘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용서를 받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동이 솟아올랐다.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때가 37세였다. 30대 후반, 목사안수를 앞두고 나는 큰 교훈을 얻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원수는 반드시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이날부터 나는 모두가 친구이자 동반자라 생각하고 목회했다.
이 시절, 나를 목사로 키우고 다듬어 주신 분도 만났다. 김창인 광성교회 원로목사였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