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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논단] 흑서와 백서, 갈라진 나라



어느 교수가 진지하게 물었다. “사람들이 왜 문재인 대통령을 싫어할까. 무얼 그리 잘못했다는 걸까.” 신기하게도 정말 몰라서 묻는 듯했다. 반면 한 유명 대학 교수는 한국의 진보세력을 ‘위선자’라고 단정한다. 그쪽 신문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 단호함에 숨이 막힐 정도이다.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진영 대립이 격화될 수밖에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신적 ‘내전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놈의 ‘조국 사태’는 1년이 지나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양상으로 자가번식하고 있다.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검찰 개혁과 촛불시민’이라는 ‘조국 백서’를 냈다. ‘검찰의 무차별적인 수사와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자 반대쪽 사람들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라는 ‘조국 흑서’를 냈다. 그 책의 내용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라는 부제에 오롯이 함축돼 있다. 두 책은 철학도 지향점도 정반대다. 그러나 상대방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다. 흑서와 백서는 일란성 쌍둥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동일한 사실을 상반되게 이야기하는’ 세기말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사안이 생길 때마다 확증편향, 한국식 어법으로는 진영논리가 국민을 두 쪽으로 갈라놓는다. 같은 날 같은 사건을 두고 이쪽 신문은 “산으로 가자” 하는데, 저쪽 신문은 “바다로 가자”고 한다. 사람 사는 곳이니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편이라고 ‘묻지마 지지’하고 우리 편이 아니라고 ‘닥치고 반대’하면 그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진영논리에는 논리가 없다’고 했던가.

그 피해를 온 국민이 안고 살아야 한다. 토론을 통한 합의 도출이 민주주의의 강점이요 꿈이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회, ‘프레임’을 걸어 상대방을 ‘박멸’하는 것이 정치 본령이 되다시피한 나라에서 이성적 토론이란 언감생심일 뿐이다. 이런 풍토에선 민주주의가 살 수 없다.

문제는 이 확증편향의 저주를 피할 길이 마땅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이 우리를 고뇌하게 만든다.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시비 거는 것이 인간이다. 거기에다 SNS와 인공지능이 사람들의 지적·감정적 편향성을 증폭시킨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별하는 것보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과학기술의 편리함에 녹아 있는 현대인에게 이 추세는 그야말로 불가역적이다. 파멸의 순간이 다가오는데 손을 놓고 있을 것인가. 오늘은 우선 한마디만 하고 싶다.

첫째, 진영마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해서는 안 된다. 내 눈에 아무리 같잖아도 그들 역시 대한민국 국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정치적 견해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각자의 개인적 취향이 그 바탕이 된다. 비빔밥 좋아하는 사람이 된장찌개 먹는 사람을 탓할 수 있는가. 진보든 보수든, 다른 사람의 말할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볼테르는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말을 할 권리는 존중한다’고 했다.

둘째,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어차피 불완전한 존재이다. 우리 모두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내 생각이 절대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어떻게 저 사람의 말을 전면 무시할 수 있는가. 남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확증편향의 저주를 떨쳐낼 첫걸음이다. 괴롭지만 상대방의 말을 듣다 보면 내 생각의 부족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쳐다도 보지 않던 사람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양시론’이야말로 민주사회의 국시가 돼야 한다.

얼마 전 정치적 성향이 다른 두 신문이 양쪽 사설을 공동 게재한 적이 있다. 지금도 한 친정부 신문은 정권에 비판적인 정치인들의 칼럼을 정기적으로 연재하고 있다. 이런 작은 노력이 쌓이면 콘크리트도 감동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어느 라디오 캠페인이 말하듯, ‘바로 듣는 것’이 대한민국을 세운다. “테러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성과 합리가 마비된 맹목적 믿음이 전체주의를 부른다. 확증편향은 무서운 것이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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