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햇살이 비치는 뒤뜰. 일주일에 한 번 와서 3시간 봉사하고 간다는 ‘취준생’ 자원봉사자의 야무진 걸레질이 지나간 툇마루는 말끔했다.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 한옥은 정면은 물론 뒷면에도 툇마루가 있었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바깥채가 맞물려 트인 ‘ㅁ’자 형태를 이루는 구조가 특이했다. 대문을 들어서니 소담한 정원이 방문객을 맞는다. 서초동 향나무(서울 서초구 서초동 사거리 향나무)보다 키가 더 큰, 수령 100년 넘는 향나무가 정원 한가운데 훤칠했다. 그래도 ‘ㅁ’자로 갇힌 마당이라 답답했는데, 이렇게 집의 뒤쪽을 보곤 확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통상의 규모를 넘어서는 넓이 때문이다. 육순에 이 집을 보러 왔던 그가 단박에 계약을 체결한 것은 대지 면적의 5분의 2를 차지할 성싶은 넓은 뒤뜰에 반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덕분에 북향집인데도 햇살이 용(用)자 형 창을 통해 안방으로 환히 비쳐드는 이 집, 뒷모습이 아름다운 이 집, ‘최순우 옛집’에 가을이 흐르고 있었다.
옛 주인의 안목과 아취를 증거하는 집
지난주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한 골목길에 있는 그 집을 찾았다. 1930년대 초 지어진 근대 한옥이다. 1976년 새 주인 혜곡 최순우 선생(1916∼1984)에게 발견돼 그가 작고할 때까지 말년의 8년을 보냈던 집이다. 처음 볼썽사나웠다던 뒤뜰은 그의 손이 미치며 아취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산수유, 모과나무, 단풍나무, 감나무, 소나무…. 온갖 나무가 숲을 이루듯 큰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가을이면 노랗게 익어 지인들에게 나눠주곤 했다던 모과는 아직 푸른빛 그대로인데, 성질 급한 풋감 몇 개는 벌써 노랗게 익어 뾰족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합창하는 듯한 풀벌레 소리도 가을을 알렸다.
혜곡은 이 한옥 뒤에도 현판을 내걸었다. ‘오수당(午睡堂)’. ‘단원(김홍도) 유묵첩’에서 찾아내 그 글씨 그대로 썼다. ‘낮잠 자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으로 인하여 더욱 한가롭고 여유로운 공간이 됐다.
인공적으로 가꾸지 않은 곳, 그래서 자연미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 문인적인 운치를 더하는 것은 문인석, 돌확 등 석물이다. 위치가 기막혔다. 툇마루의 정중앙쯤이다. 향로석이 뜬금없이 놓여 있었다. 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 반듯한 돌 아닌가. 혜곡은 그걸 뒤뜰 중앙에 옮겨와 백자를 올려두고 감상했다고 한다. 향로석 뒤로 댓잎들이 무성했다. 아, 향로석 위 청화백자에 배경처럼 춤추는 대나무라니. 그건 한 폭 산수화에 다름 아니었다. 추운 겨울엔 안방에서 용자형 창문 너머로 이렇게 자연 속에 놓인 백자를 감상했을 혜곡이 문득 상상됐다.
평범한 생활용품도 혜곡의 손을 거치면 미술이 됐다. 한옥 정면 툇마루에는 대형 함지박을 백자와 나란히 두고 감상했다. 김장을 버무렸을 때 쓰는 함지박은 그렇게 혜곡으로 인해 감상의 대상이 됐다. 돌확은 ‘꼬마 연못’이 됐다. 찬탁(부엌 찬장)을 스스럼없이 책장으로 썼다.
현장의 연구, 안목과 글솜씨로 한국미 전도사
최순우 선생은 이렇듯 보통 사람은 무심코 지나치는 투박한 생활용품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한국미의 순례자’ ‘한국미의 재발견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개성에서 나고 자랐다. 1935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미술사학자 고유섭에게 감화를 받아 한국 미술사 연구에 뜻을 세웠다. ‘조선고적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개성의 여러 고고유적지를 답사했고, 특히 고려청자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고보 졸업 후 잠시 교편을 잡다가 1945년 개성시립박물관에 들어간 걸 계기로 한국 미술사 연구에 몸담기 시작했다. 1949년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연구관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 등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청사를 구(舊) 중앙청 건물로 이전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중 1984년 12월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혜곡 최순우. 그는 미술사 학위는 없지만 부지런한 현장 연구, 타고난 성정과 안목으로 학문적 영토를 넓혔다. 1960년 여름 ‘고고미술동인회’(한국미술사학회 전신)를 발족하여 전국의 유적지를 누비고 ‘고고미술’을 발간해 한국 미술사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한국미술사 개설’ ‘한국 공예사’ ‘한국청자도요지(韓國靑磁陶窯址)’ 등의 연구서도 남겼다.
그러나 최순우답게 만든 것은 그의 안목과 글솜씨다. 자신이 ‘재발견’한 한국미를 어려운 논문이 아니라 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쓴 수필 형식을 빌려 세상 사람들과 공유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가 대표적이다. 산사에서 내려다보는 빤한 풍경, 즉 풍경을 바라보는 위치조차도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승격시킬 줄 아는 안목의 소유자였다.
본명은 희순이다. 순우는 필명. 같은 성북동에 살았던 열 살 손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아들 항렬을 따서 지어줬다고 한다. 그만큼 최순우 선생을 아꼈다. 간송을 비롯해 건축가 김수근, 화가 변종하 김종학 김환기 박수근 등 여러 예술인과의 교유를 증거하기도 하는 이 집은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시민 성금으로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집 장사’에 의해 다세대주택이 될 뻔했던 위기에서 구출된 그 기막힌 이야기를 이제 이야기하고자 한다. 김홍남(72)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뚝심과 한옥 사랑이 뒤에 있다.
시민들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집
“있습니다. 한옥이 있지요.”
2002년 8월 초. 시민단체에서 한옥보존운동을 하며 사무실로 쓸 한옥을 구하던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당시 이화여대 교수)에게 부동산업자가 말했다. 성북동에 그럴듯한 한옥이 나왔다는 얘기였다. 김 교수는 더위를 마다하지 않고 당장 보러 가자 했다. 이상한 예감은 적중했다. 매물로 나온 것은 최순우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그 집이었다. 작고한 뒤 외동딸이 20년 가까이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가기 위해 내놓았다. 이미 가계약이 된 상태였다. 한옥을 허물고 다세대주택을 짓는 붐이 일던 때였다. 그때 김 전 관장은 ‘한옥 보존의 대모’ 정미숙 한국가구박물관장을 위시한 지인 20명과 ‘한옥아낌이모임’을 결성하고 북촌문화포럼을 창립하는 등 한옥 멸실을 막기 위해 매입운동을 한창 벌이던 때였다.
혜곡의 집이야말로 문화유산 아닌가. 허무하게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김 전 관장은 딸을 설득했다. 가계약은 취소됐다. 하지만 8억5000만원이라는 집값을 어디서 구해 매입할 것인가.
“절실하게 원하면 이뤄지더라고요.”
며칠 뒤 북촌 한옥 자택에서 만난 김 전 관장은 당시 일화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놀랍게도 한옥 보존에 동참했던 김성국 교수·정청자씨 부부가 2억500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등 최순우 선생의 책을 다수 출판했던 학고재 우찬규 회장이 “책 팔아 번 돈 전부”라며 1억원을 두말하지 않고 내놓았다. 나머지 5억원은 당시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을 지냈던 홍라희씨가 도와줬다.
집은 매입했지만 제대로 복원하려면 3억원가량이 더 필요했다. 이번에는 현금이 아니라 십시일반 현물 지원을 받았다. 김 전 관장은 “안방 구들은 누가, 마당은 누가, 정원 조경은 누가, 돌담은 누가 하는 식으로 후원자의 전문성을 살렸다”고 말했다. 예컨대 뒤뜰의 석물은 성북동 우리옛돌박물관에서 도와주는 식이었다. 그렇게 보수복원에 20여명이 동참했다. 그렇게 해서 ‘최순우 옛집’은 2004년 시민문화유산 1호가 됐다. 2006년 나주 도래마을과 서울 성북구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가 각각 시민문화유산 2, 3호로 탄생했다. 최순우 옛집은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로 더 빛이 난다. 덕분에 비질한 마당은 깨끗했고, 마루는 정갈했다. 이곳에서 열리는 전시,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는 최순우의 안목을 우리 앞에 불러낸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