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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뜸 들이는 시간



눌어붙은 그릇의 설거지는 참 어렵다.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도 달라붙은 음식물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며 힘을 줘봤자 팔만 아프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릇들을 뜨거운 물에 담그고 자리를 떴다. 한참 뒤에 돌아와 보니 오호라, 딱딱하게 달라붙어 미동도 없던 음식 찌꺼기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불어, 수세미가 슬쩍 지나가기만 해도 깨끗이 떨어져 나갔다.

한 기관에서 자문 의뢰가 왔다. 해당 센터 상담사가 제일 고민되는 사례라며 한가득 서류를 내밀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그분이 들였던 온갖 노력의 흔적들이 정말 가득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일은 지금 당장 해결될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더 해봐야겠냐 묻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 지쳐보였다.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경력 많은 컨설턴트와 나는 의견이 같았다. 지금 여기에 더할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도 안 될 때 우리가 할 것은 딱 하나. 씨앗을 심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어떻게든 이걸 당장에 해결해야지’라며 문제에 달려들 때 우리는 오히려 지쳐 나가떨어지기 쉽다. 그 문제가 오래 존재할 수밖에 없던 상황, 한 가정의 역사라는 것이 있는데, 아무리 전문가라도 그것을 단번에 달려들어 해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망상에 가깝다. 딱딱하게 달라붙은 찌꺼기가 그 어떤 도구를 써도 안 씻어진다고 그릇을 그냥 깨버릴 게 아니라면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엄청난 고난도 문제가 상영시간 안에 다 풀리며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런 매체를 자주 접하다보니, 현실 속 우리들 역시 마주친 문제나 어려움을 견디기보다 바로 없애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삶이 어디 그런 것이던가. 뜨끈한 물에 담가 푹 불리고, 충분히 뜸을 들여야 하는 일도 있는 법.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해결 안 되는 일들은 슬쩍 한 발 물러서보자. 씨름처럼 힘보다는 타이밍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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