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는 새해 연중기획으로 변순철 사진작가와 함께 접경지역에서 농사짓고 장사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소개하는 ‘평화 만들기 공감 프로젝트’를 매달 진행한다. 접경지역은 비무장지대(DMZ) 또는 해상의 북방한계선에 면해 있는 경기도 파주·연천, 강원도 양구·철원 등 10개 시·군을 일컫는다.
1월 1일 자로 나간 연천의 어부 부자(父子) 유기환·흥용씨를 취재하러 갔다가 접경지역 현실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한탄강을 찾은 관광객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던 사격 훈련장의 포 소리는 그곳에선 이웃집 개 짖는 소리처럼 흔했다. 아들 흥용씨는 “포탄이 우리 집 마당에 떨어진 적도 있는데요, 뭐”라고 말하기도 했다.
접경지역은 분단 70여년 동안 국가 안보를 이유로 각종 규제에 묶여 개발과 재산권 행사에 제한을 받았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변방이 된 접경지역은 그러나 한국전쟁 전까지는 남북 교류의 중심이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였던 국토의 중심부였다. 수로와 육로, 철로를 따라 사람이 몰리고 물산이 집결했다. 연천, 파주, 김포 등에는 북의 개성이나 금강산으로 가는 배가 다니고 철도가 연결돼 있었다. 연천엔 1930년대 화신백화점 지점이 있을 정도로 번화했다.
사통팔달이던 접경지역 교통은 분단으로 끊어졌다. 군인이 더 많이 사는 동네가 됐다. 안보가 취약하니 발전은 더디었다. 정부의 인프라 투자에서도 우선순위가 밀리는 등 이중삼중의 피해를 본다.
경기연구원 이정훈 북부연구센터장은 이런 접경지역이 한국 경제의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냉전시대에는 핸디캡이 되는 지정학적 조건이 남북 교류만 정상적으로 이뤄지더라도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79년 중국 개혁개방의 실험적 모델로 출발했던 홍콩·선전 특구가 그런 사례다. 체제는 다르지만 서로 합작 투자를 하면서 광동-홍콩-마카오 초국경 광역경제권의 규모는 현재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12%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메시지에서 ‘한반도 평화, 변화의 바람’을 언급한 것은 그래서 주목된다. 궁여지책이라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K방역 선진국’에서 졸지에 ‘백신 후진국’이 됐다. ‘검찰 개혁’의 기치는 민망한지 신년사에서 빠졌다. 문 대통령이 제시했던 검찰 개혁의 1차 성과물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출범을 앞두고 있지만, 이른바 ‘추미애·윤석열 갈등’에서 여권이 패했기 때문이다. 집값은 좀체 안정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난맥상으로 인해 대통령 지지율이 최저치로 떨어진 시점에서 한반도 평화 카드를 내밀었다.
한반도 문제에 돌파구를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의 정권 교체로 한반도 평화 방정식의 난이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북·미 정상의 직접 담판을 통한 톱다운 방식은 미국 내 비판을 개의치 않았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었기에 가능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기후 문제, 무역 문제 등에서 세계를 위험에 빠트린 악동이었지만 남북 문제에서만은 그의 방식이 쾌도난마의 해법일 수도 있었다. 트럼프의 퇴장을 바라보는 남북 정상의 심정은 모두 복잡할 거 같다.
그럼에도 지혜를 짜내 돌파해야 한다. 4월 보궐선거나 차기 대선 승리를 위한 정치 공학적 측면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미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센터장이 제시하는 ‘한강 포구 남북물류 네트워크’ ‘남한 연천·철원과 북한 평강·철원을 연결한 경원 축 경제특구’ 구상 등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조셉 윤 전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문재인정부는 바이든과 겹치는 1년5개월 동안 다자든, 양자든 대화 프로세스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뭐라도 하는 정부였으면 좋겠다. 쇼가 아니라 실행력으로.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