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노부부의 전국 유람기 ‘팔도강산’(1967)은 33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 한국영화 흥행 1위에 등극했다. 한약방을 하던 김희갑, 황정순 부부가 팔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아들딸을 만나러 나선 길에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산업 현장과 오천 년 역사를 간직한 명승고적 및 금수강산을 구경한다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그 단순한 이야기에 연신 웃고 울었다. 잘살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희망적이었고, 쉽게 찾아 가볼 수 없었던 산천과 유적지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국립영화 제작소에서 제작된 최초의 정책 홍보 영화이기도 했던 ‘팔도강산’은 ‘속 팔도강산’ ‘내일의 팔도강산’ ‘아름다운 팔도강산’ 등 속편 행진을 이어가며 경제발전의 성과를 ‘빛나게’ 보여주었다.
영화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TV수상기 보급이 활성화되며 자리 잡기 시작한 안방극장에서도 산업화의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KBS 일일연속극 ‘꽃피는 팔도강산’(1974~1975·398회)이었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정책 홍보 드라마의 꽃
협동한의원 원장인 김희갑과 황정순은 영화와 달리 딸만 일곱을 두었다. 큰딸 최은희는 국립과학기술연구소 박사인 장민호와 서울에 살고 있고, 둘째 도금봉은 유랑 극단 단장을 하다 농사를 짓는 박노식과 전라도에 살고 있다. 셋째 김용림은 목장을 운영하는 황해와 경기도에서, 넷째 태현실은 한국 전쟁 때 부상을 입어 장애인이 된 박근형과 속초에서 횟집을 하고, 다섯째 윤소정은 포항제철에 다니는 간부 사원 문오장과 포항에, 여섯째 전양자는 울산 공단 내 석유 회사에 다니는 오지명과 울산에 살고 있다. 막내 한혜숙은 스튜어디스로 유행의 첨단을 걷는 워킹우먼이었고 그녀의 연인은 재벌 후계자임을 숨기고 막노동을 하는 일종의 언더커버 민지환이었다. 이외에도 최은희의 딸로 김자옥, 그녀의 연인으로 최정훈, 태현실의 아들로 백윤식 등이 출연했다.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촉망받는 신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한국 방송사에서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정책 홍보라는 목적성을 명확히 갖고 있었던 ‘꽃피는 팔도강산’은 과학자와 제철소 간부, 석유 화학 회사 직원인 사위들을 통해 산업화의 성과를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쉽게 구경할 수 없었던 포항제철이나 울산 공업단지는 최신 시설과 압도적인 규모만으로도 시청자들을 감탄케 했다. 농작물의 생산 시기를 조절하거나 생산성을 향상하고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비닐하우스를 도입한 농촌이나 낙농의 기계화를 실현해 가는 목장은 1차 산업에서도 혁신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도 적극적으로 조명했다. 전양자는 맞벌이 부부였고 한혜숙은 대한항공 스튜어디스였다. 태현실은 팔이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횟집을 주도적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김용림도 남편과 함께 목장 일을 했다. 최은희는 1975년 월남 패망 후 한국에 온 월남 피난민들의 임시 거주지인 월남 난민촌에서 우리말을 가르치기도 했으니 여성의 노동은 더 이상 가정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이외에 불임으로 고민하는 부부의 이야기와 함께 입양문제를 등장시켰고,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삶도 세밀하게 조명했다. 의료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무료 의료 봉사활동을 통해 공동체 의식의 중요성도 보여주었고, 사치스럽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검소한 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목적극이 갖는 훈시적인 메시지를 동시대인의 정서에 담아 희망 있게 그려낸 ‘꽃피는 팔도강산’은 방송사와 정부, 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덕분에 녹화 차량을 이용해 제작한 최초의 드라마, 대한항공 파리 취항을 기념하기 위한 협찬이었지만 파리 현지 녹화를 한 최초의 해외 로케이션 드라마, 주요 일간지에 전면 컬러 광고를 집행한 최초의 드라마라는 수식어를 훈장처럼 갖게 되었다. 이후 기록은 경신되었지만 야외 녹화 최다, 회당 최고 제작비라는 기록도 한동안 갖고 있었다.
정부는 TV 드라마를 어떻게 활용했나
1956년 HLKZ-TV의 개국으로 시작된 우리의 텔레비전 방송은 1959년 화재로 시설 모두가 소실되면서 짧은 첫걸음의 역사를 남겼다. 1961년 5·16군사 쿠데타로 들어선 정부는 그해 여름 ‘새로워지는 나라와 겨레의 모습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눈으로 보고 그들의 생활로 삼게 하기 위해서’라며 국영 텔레비전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라 1961년 12월 KBS가 개국했고, 1964년 TBC, 1969년 MBC TV가 개국했다. 텔레비전 방송이 낯설었던 국민을 TV 시청자로 만들기 위한 방송 3사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그 중심에 드라마가 있었다.
라디오 드라마에 익숙했던 시청자들은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드라마를 선호했다. 방송사로서는 취약한 제작 환경에서 제작비와 제작인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최적의 장르였고, 광고 수주 또한 용이한 알토란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의하면 일일연속극 회당 제작비가 50여만원인데 광고수익은 100만원을 넘어섰다고 하니 드라마 제작이 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74년 편성표를 보면 하루 15편 안팎의 드라마가 3사에서 방송되었다. 방송시간이 평일은 저녁 6시부터 밤 11시 30분, 토요일엔 오후 1시부터 자정, 일요일엔 오전 7시부터 밤 11시 30분까지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기 드라마가 방송될 때 집에 도둑이 드는 것도 모를 만큼 몰입하다 낭패를 당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서울시는 1972년 ‘골든아워 좀도둑 경계령’을 내리기도 했다.
새로워지는 나라와 겨레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도입한 텔레비전 방송이 드라마 왕국을 만들었으니 당시 정부로서는 답답했겠지만 한편으로는 TV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도시에 치중되어 있던 TV 수상기 보급을 전국으로 확대하고자 1972년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TV보내기 운동인 ‘텔레비전 효자 캠페인’과 ‘새마을TV 보급운동’ 등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71년 61만대였던 TV 수상기는 1974년 161만대, 1975년 206만대로 빠르게 증가하며 대중적인 오락 수단으로 입지를 굳혔다.
이와 함께 정부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TV 프로그램 정비에 들어갔다. 퇴폐적이고 무절제하며 상투적이고 통속적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으로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가 심히 우려된다며 1971년 방송사에 자숙을 요청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드라마 열풍이 쉬이 가라앉지 않자 1973년에는 아침 방송을 전면 중단하면서 방송사 편성권에 대한 간섭과 통제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텔레비전 방송 출범의 정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열의 재정비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극히 상업적이었던 드라마의 자리에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소재로 한 정책 홍보 드라마들이 당당하게 자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와중에 ‘꽃피는 팔도강산’이 탄생했다.
녹화와 편집이 가능한 제작 시스템을 갖춘 지 얼마 되지 않았고, ENG 카메라도 없던 시절 전국을 종횡무진 누비며 일일연속극을 만들어내야 했던 ‘꽃피는 팔도강산’의 기획은 획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피디들은 부정적이었고 작가들도 쉽게 섭외되지 않은 와중에 영화사 신필름에서 영화 제작 경험이 있던 김수동 피디와 인기 드라마 작가인 윤혁민이 이 중차대한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정책 홍보 드라마이지만 대중성을 잃지 않은 가족 드라마로 만들어낸 피디와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나팔수라는 비난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가장 성공적인 홍보물’이라는 칭송 아닌 칭송을 받았던 ‘꽃피는 팔도강산’. 당시 홍보 문구에도 있듯이 ‘최고의 제작비와 호화 배역을 총동원’한 이 드라마는 내놓고 정책을 홍보했던 유일무이한 드라마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2009년, ‘꽃피는 팔도강산’은 ‘종착역’이란 드라마로 중국에서 리메이크되어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