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아이를 돌아보지 아니하여 귀하고 정한 아기를 더럽고 천한 모습을 만드니 가석한 일이로다. 또한 여아는 멸시하여 잘 보호치도 아니하고 병이 들어도 심상히 여기니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니라.”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인 매티 윌콕스 노블(1872~1956) 부인이 1901년쯤 펴낸 ‘아모권면’의 일부다. 이 책은 요즘으로 치면 ‘임신·육아·출산 대백과’와 같다. 총 19쪽의 소책자로 태교 출산 육아 응급처치법 등을 담았다. 윌리엄 아더 노블(1866~1945)과 결혼해 1892년 조선 땅을 밟은 기혼 여선교사 노블 부인은 어쩌다 육아법을 다룬 책을 쓰게 됐을까.
불결한 환경에 노출된 산모와 갓난아기, 여아를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풍습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게 계기다. 노블 부인은 조선에 온 첫해부터 1934년까지 42년간 평양과 서울에서 지낸 일상과 사역을 일기에 기록했다. 1898년 1월 24일 일기에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몇 주 전 생후 6주 아기가 있는 여성의 집에 방문했다.… 아기는 기저귀도 차지 않은 채 더러운 누더기에 쌓여있었다. 아기는 헌데투성이에 울고 있었다.… 부모는 아기를 돌보고 보살펴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아기가 더 살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아기는 딸이었다.”
당시 노블 부인은 2년 전에 생후 9개월이었던 아들 시릴을 평양에서 잃었다. 일기를 쓴 그해엔 생후 10개월 딸 메이를 연이어 하늘로 보냈다. 희박한 위생관념과 어린 자녀, 특히 딸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문화에 예민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조선 어머니에게 위생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동시에 건강한 육아법, 남아선호사상 철폐 등을 계몽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쓴 노블 부인의 ‘아모권면’은 본래 한국교회 여성을 대상으로 쓴 책이었지만, 일반 잡지인 ‘소년한반도’에도 내용이 실렸다.
“어린아이는 하나님이 준 예물” “아들이나 딸이나 하나님 앞에서 모두 귀하다. 남녀를 평등하게 대우해야 나라가 강성해질 것”이란 기독교적 표현이 가감 없이 구한말 우리 사회에 전해진 것이다.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기혼 여선교사로서 여성·어린이 계몽사업을 하며 한국인 여성 지도자를 세운 노블 부인의 폭넓은 사역에 주목했다. 특히 노블 부인의 일기에 기록된 당대 선교사의 식생활과 주거문화, 자녀 양육과 문화생활 같은 미시사 복원에도 관심을 쏟았다.
노블 가족의 사교활동을 기록한 대목에서는 1908년 평양에서 해리스 미 감리회 한국연회 초대감독 등 15명을 초대한 행사 내용이 나오는데, 이날 정찬 메뉴가 인상적이다. 고기 수프와 화이트드레싱을 얹은 찐 생선과 으깬 감자, 양배추 샐러드와 구운 새고기, 호박파이와 커피 등 6단계 코스요리가 등장한다. 저자는 “오늘날 양식 코스요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라며 “코스요리를 준비할 수 있을 만큼 (조선에) 식료품 유통구조가 확보됐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한다.
여성 인권을 높이려는 노블 부인의 노력도 여러 곳에 등장한다. 1896년 집을 개방해 여성을 위한 한글교실을 연 그는 학생 가운데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세례명을 지어줬다. 가부장제도 속에서 제대로 된 이름이 없던 여성들은 세례명을 받은 날을 “일생에서 가장 기쁜 날”로 기념했다. 이후 2년 뒤 평양 최초의 여자사경회를 열며 조선 여인의 신앙과 전도 열정에 감탄한 그는 한국인 17명의 신앙 역정을 기록한 ‘승리의 생활’에 남성사역자보다 전도부인의 사례를 더 많이 기록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 현장을 지켜본 증인이다. 당시 정동에 살던 노블 부인은 길가에 뿌려진 전단 등을 수집해 3·1운동의 진행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했다.
“교양 있는 기독교인인 한 한국인은 내게 한국인은 이전에 미국인이 그랬듯 독립운동을 시작한 거라고 말했다. 그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고 또 비록 맨손이지만 승리할 때까지 계속할 거라고 덧붙였다.”
선교사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역사도 마주할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