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이 ‘방구석 1열’에 나란히 앉는다. 대만 영화 ‘음식남녀’(Eat Drink Man Woman)와 미국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
‘음식남녀’에선 요리사 아버지와 세 딸이 주요인물이다. 맛으로 기억될 소중한 시간이라고 이안 감독은 포스터에 적었다.
‘음식남녀’에선 요리사 아버지와 세 딸이 주요인물이다. 맛으로 기억될 소중한 시간이라고 이안 감독은 포스터에 적었다.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밥맛이라 칭하지만 인생에선 꿀맛이 아무리 좋아도 밥맛을 대체할 수 없다. 입맛 대신 ‘병맛’이란 말이 유행한 적도 있다. 사전에 따르면 ‘병맛’에는 세 가지가 없다.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없어도 살맛 나게 하는 예능은 얼마든지 있다.
‘맛있는 녀석들’은 별다른 구성없이 그저 먹기만 하는 프로다. 여기에도 네 남녀(유민상 김준현 김민경 문세윤)가 등장한다. 2015년 3월부터 순항 중인데 출연자들은 댓글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눈치다. 너희 때문에 다이어트 실패했다는 비난에도 웃음기를 거두지 않는다. 앓던 할머니가 방송을 보고 식욕을 되찾았다는 얘기엔 감동으로 대꾸한다. 세상에 이처럼 행복한 연예인들이 있을까. 대본 외울 필요도 없고 그저 맛있게(!) 먹어주면 된다. 출연료는 입금되고 인지도는 올라간다. 유일한 여성 출연자인 김민경은 이런 말을 남겼다. “맛은 마음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는 터지지 않는다.”
문득 박목월의 시 ‘적막한 식욕’이 생각난다.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식성” 이처럼 투자대비효율이 높은 프로그램을 찾기란 쉽지 않을 거다. 광고주도 만족한다. 그래선지 돌리다 보면 어느 채널에선가 항상 이 프로가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라이언 머피 감독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줄리아 로버츠가 이탈리아에서 먹고 인도에서 기도하고 발리에서 사랑하는 이야기다. 살다 보면 인생은 짧지만 일생은 길다. 그래서 먹어야 한다. 아니 먹어야 산다.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먹고 살기 힘들어요”도 있고 “근근이 먹고는 삽니다”도 있다. 어찌 됐든 살기 위해 먹는 것보다는 먹기 위해 사는 게 나아 보인다. 그렇다. 결국 영화건 드라마건 먹고 살자고 하는 이야기다. 다만 그냥 그것에 그치느냐 혹은 그것을 뛰어넘느냐 하는 점에서 예술성이 달라질 뿐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에는 하찮은 내 인생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숨어있다. 어떻게 인생을 예술로, 적어도 예능으로 만들 수 있을까. 참고로 ‘잘 먹고 잘사는 법’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박정훈 PD는 현재 SBS 사장이다. 만나서 대화해보면 프로그램뿐 아니라 인생 연출도 잘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요즘은 “잘 먹고 잘살아라”는 덕담을 악담으로 쓴다. 그 문장 앞에 ‘너 혼자’가 생략된 탓인가. 이제 너랑은 더 이상 볼 일 없다는 얘기를 돌려서 한 것인가. 결국 ‘나 혼자 산다’는 건 ‘나 혼자 먹는다’는 얘기니 시대의 처량한 풍속도가 아닐 수 없다.
방송사엔 구내식당도 있지만 방송용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도 있다. 갓 입사해서 선배에게 소품 음식을 먹으면 3년간 재수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보니 세분해서 시행해야 할 조언이었다. 소품으로 ‘쓸’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거였지 소품으로 ‘쓴’ 음식은 먹어도 아무 지장이 없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으려고 직원들이 카메라 뒤에 서서 기다리는 프로도 있었다. 제목은 ‘오늘의 요리’다. 요리, 아니 녹화가 끝나면 바로 음식이 동났다. 강사는 요리연구가였는데 옆에서 보조하는 연기자의 이름이 제목으로 부각됐다. 1981년 ‘고두심의 오늘의 요리’를 시작으로 김수미, 김영란을 거쳐 1991년 ‘전인화의 오늘의 요리’로 끝났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방송이 끝나면 사무실 전화기에 불이 났다. 재료 구입처를 묻는 말부터 출연자 의상이 그게 뭐냐, 요리하면서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는 항의가 많았다. 침이 튀는 게 화면에 보인다는 지적도 있었다.
음식 예능이 있는데 음식 드라마가 없으랴. ‘파스타’는 요리를 사랑하는 남자(이선균)와 사랑을 요리하는 여자(공효진)의 이야기다. 두 가지 실적(?)을 남겼다. 셰프라는 외국어가 시청자에게 익숙해진 건 “예스 셰프”(Yes, Chef)라는 대사 덕분이었다. 주방장과는 느낌이 달랐다.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한 종류일 뿐이라는 정보도 알렸다. 방송 당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드라마에 자주 나왔던 알리오 올리오의 주문이 증가했다는 기사도 실렸다. 드라마와 예능은 서로에게 영감을 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각으로 보면 ‘냉장고를 부탁해’도 드라마 ‘파스타’의 연장선에 있다. 유명셰프 샘 킴과 이선균은 46화에 함께 출연해서 예능감을 뽐냈다.
예능의 음식 남녀는 식감과 예능감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두 사람을 뽑자면 김수미와 백종원이다. 김수미는 ‘오늘의 요리’를 보조하면서 이미 싹수를 드러냈다. 칼로 재료를 썰다가 슬쩍슬쩍 전문가의 영역을 침범했다. 그 후 ‘수미네 반찬’ ‘밥은 먹고 다니냐’ ‘수미산장’ 등으로 이어지더니 도대체 일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별난 캐릭터도 한몫했다. 품격을 버리니 운동장이 넓어졌다. 꽃이 꽃밭이 되려면 나비와 꿀벌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는 가까운 연예인들에게 직접 요리한 음식을 선물했다. 마치 앙드레 김 선생이 외교관 부인들에게 한국 고유의상을 선물한 사례와 비슷하다. 밥심에서 나왔을 그 꾸준함은 든든한 밥줄로 연결됐다.
김수미의 예능감이 폭발한 사례가 있다.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그는 능청스럽게 ‘젠틀맨’이라는 방송가의 속요를 불렀다. 나는 기억한다. 원래는 MBC 제작3부 부장님이 회식 자리에서 늘 부르던 노래였다. “공부 잘해 취직한 놈/ 너만 잘났냐/ 백수지만 꿈 많은 나/ 나도 잘났다/젠 젠 젠 젠틀맨이다/ 돈 많아서 양주 먹는 너만 잘났냐/ 돈 없어서 소주 먹는 나도 잘났다/ 젠 젠 젠 젠틀맨이다”
백종원의 바탕은 해박한 요리지식(백종원의 ‘백’을 백과사전으로 풀기도 한다)과 입담, 구수한 캐릭터, 특유의 순발력과 친화력이다. 2015년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시작으로 ‘집밥 백선생’ ‘골목식당’을 거쳐 ‘맛남의 광장’까지 진출했다. 작은 모니터에서 시작하여 광장까지 영토를 확장한 셈이다. ‘푸드트럭’을 타고 그가 향하는 길을 보면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광범위한 친분을 이용하여 강릉 못난이 감자에 이어 해남 왕고구마 판로 지원에도 나섰다. 심지어 방탄소년단에게까지 부탁을 한다. 한돈농가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맛있게 먹는 장면을 촬영해주면 자신이 가서 요리도 해주고 햄도 한 박스씩 주겠다고 약속한다.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형이라고 불렀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누군가와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건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했다. 김수미와 백종원은 탁월한 예능커뮤니케이터다. 백종원은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으며 김수미는 확신에 찬 욕쟁이다. 만약 다수의 시청자에게 위선이나 교만으로 비치면 그들은 산장에서, 광장에서 바로 쫓겨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계획이 있다. 김수미는 재미있게, 백종원은 이롭게 하는 게 일관된 목표다.
‘대화의 희열’에 나온 백종원에게 유희열이 물었다. “피부가 왜 이렇게 좋으세요.” 짐짓 의술의 도움이란 고백을 기대했는데 돌아온 건 해맑은 소년의 표정이었다. “행복해서 그래요.” 다시 ‘적막한 식욕’으로 돌아가자.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너고 저승을 갈 때” 백종원은 비로소 행복한 사업가다. 사랑이라 쓰고도 사업으로 엮는 세상인데 반대로 사업이라 쓰고 사랑으로 연결하는 그가 썩 괜찮아 보인다.
주철환 프로듀서 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