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는 많은 사람이 한 번쯤 등 떠밀리듯 읽게 되는 작품이다. 자아가 형성되기 전 이 책을 읽으며 당연한 듯 남자 주인공 피에르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뼈저리게 알게 된 사실은 죽었다 깨도 피에르의 입장이 될 수 없다는 것.

현재 상연되고 있는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의 원제는 ‘나타샤, 피에르, 1812년의 대혜성’으로 두 주인공의 이름과 1811년에 나타나 1812년에 사라진 거대한 혜성을 동급으로 나란히 내세웠다. 작품 안에서 혜성은 단연 나타샤다. 등장하는 모든 중요한 인물에게 나타샤만큼 거대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없다.

나타샤에 필적할만한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인물은 전쟁을 일으킨 나폴레옹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순수한’ 피에르와 그의 ‘숭고한’ 친구 안드레이 둘 다 나타샤를 사랑하며, ‘바람둥이’ 아나톨 역시 나타샤를 사랑한다. 재미있게도 이 세 사람은 모두 유부남이다. 거의 등장하지 않는 아나톨의 아내와 달리, 정숙하지 못한 안드레이의 아내 그리고 피에르의 아내는 아이를 낳거나 낙태를 하다가 죽음을 맞으면서 운명의 철퇴를 맞는다.

안드레이는 아내가 죽자마자 나타샤에게 청혼하고, 피에르 역시 아내가 죽어준 덕에 안드레이의 뒤를 이어 나타샤에게 청혼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된다. 이 중년의 사내들이 사랑에 빠진 나타샤의 나이는 열아홉이다. 톨스토이의 작품 속 여성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건만 제목의 처음에 등장하는 나타샤도, 다른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도 뮤지컬 속에서는 휘둘리다 막이 내린다.

물론 뮤지컬에는 원작의 자세한 배경은 등장하지 않는다. 애당초 ‘그레이트 코멧’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속 불완전한 인간들의 흔들리는 내면을 보여주기보다는 19세기 러시아의 카바레를 차려놓고 그 안에서 단편적으로 인물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바람을 피우고 유혹하고 유혹당하면서 관객들과 어우러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음악도 형식도 그러하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전쟁과 평화’라는 소설의 자극적인 맛보기인 셈이다.

실제로 오프-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인 99석짜리 ‘아르노바 극장’은 객석 20개를 더 들어내고 러시아 음식과 술을 함께 먹고 마실 수 있게 꾸몄고 10명의 배우가 관객들과 어우러져 대화를 나누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공연을 이어나갔다. 일종의 이머시브 뮤지컬인 셈인데, 이런 스타일의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면밀한 드라마가 오히려 관객들이 함께 즐기기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브로드웨이 진출이 결정되면서 이 작품은 고민에 빠진다. 브로드웨이 극장으로 옮길 때 모자라는 드라마와 단편적인 인물 설정을 보완할 것인가, 돈이 많이 들어도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처럼 카바레 형식을 확장할 것인가. 작품의 매력은 관객과 캐스트가 어우러지며 함께 노래하고 즐기는 데 있었기에 제작사는 큰 고민 없이 후자를 택했지만 결과는 적자였다. 객석 200개를 들어내고 프로시니엄 장식을 걷어냈을 뿐만 아니라 6명이었던 앙상블을 22명으로 늘렸고 초반에 모두 열 명이었던 배우는 36명으로 늘어났어도 원래 1000석이 넘는 대극장을 커버할 수는 없었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오프 공연을 본 사람이 승자라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떠돌았고, 브로드웨이 무대는 아름답고 공연 역시 즐거웠으나 흥행은 실패했다.

팬데믹 시대에 이머시브 공연은 금기 사항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공연 중인 ‘그레이트 코멧’은 뉴욕의 프로덕션보다 더 큰 고민에 빠졌다. 무대를 키우고 배우들도 많이 기용했지만 그렇다고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포 떼고 차 떼고 두는 장기와도 같다. 때문에 드라마와 인물의 단편적인 설정이 더 크게 보인다. 전쟁 속에서 혜성이 우주를 방랑하듯 방랑하던 마음들이 마침내 만나기까지의 여로가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피에르 역을 맡은 홍광호가 부르는 마지막 혜성의 노래는 아름다울 뿐이다. 팬데믹이 끝나고 규모가 조금은 작은 극장에서 테이블에 촛불 하나 켜놓고 술잔을 높이 들고 아름다운 나타샤와 건배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저 꿈일지도 모르겠다.

이수진 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