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군중을 표현한 작품에서는 예수를 향한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홀로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형상화한 또 다른 작품에는 고독이 묻어 있었다.
차가운 금속으로 만든 십자가 작품에서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고통을 떠안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쓸쓸한 뒷모습이 스쳤다. 예수가 우리에게 등을 보인 건 고난의 길을 따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지난달 21일 찾은 인천 계산교회(김태일 목사) 6층 로비에는 버려진 구리 선을 꼬아 만든 십자가 172점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난주간 십자가 전시회의 막바지 준비작업이 한창인 작가 이인영(72) 집사를 교회에서 만났다. 전시회는 지난달 24일부터 오는 30일까지 진행된다.
이 집사의 첫인상은 공예 작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상당히 큰 손을 보면 실처럼 가는 구리 선을 꼬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만든 십자가 중에는 자신의 손바닥보다 작은 작품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손가락 길이 정도 되는 작품도 많았다. 모든 십자가가 투박한 그의 손끝을 거쳐 완성됐다.
처음부터 십자가를 만들었던 건 아니었다. 인천공고를 졸업한 뒤 군 복무를 마치고 자동차를 만드는 기업에 취직했다. 이 집사는 “대우자동차에서 2002년까지 자동차 출고 전 최종 검수 부서에서 일했고 명예퇴직 후에는 전기공사 업체를 운영했다”며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자동차 검수를 위한 계측 장비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고 말했다.
십자가를 만들기 시작한 건 1995년부터였다. 그해 사순절, 탈장으로 입원한 아버지 병구완을 위해 병실을 지켰다고 한다. 아버지를 돌보면서 불현듯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한번 만들어 볼까’라고 생각한 것도 이때였다.
그는 “마침 공장에 버려진 구리 선 조각이 많길래 그걸로 십자가를 만들기로 했다”면서 “머리 안에만 있던 형상이 만들어지니 신기했고, 더 많은 작품을 만들게 됐다”고 했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폐구리 선이 그를 만난 뒤 속속 십자가 작품으로 탈바꿈했다.
마지막 만찬과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는 예수님의 모습도 구리 선으로 구현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찌르는 순간도 만들었다. 그동안 만든 각양각색의 작품은 800여점에 달한다. 주변 반응도 좋았다. 이 집사는 “처음부터 영리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인들에게 선물도 하고 필요한 곳에는 기증도 했다”면서 “많은 분이 응원해 주셔서 오랫동안 십자가를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고 전했다.
꼭 사고 싶다며 헌금을 쥐여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는 “십자가를 판매하면 그 돈을 모두 선교비로 사용했다”면서 “버려질 구리 선으로 만든 십자가가 선교에 사용된다는 게 마치 회개하고 주님께 쓰임받는 신앙인의 모습과 비슷해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학교에서 만난 믿음의 동지들과 ‘참좋은선교회’를 조직해 태국에 선교사도 파송했다. 구리 선 십자가가 선교의 마중물이 됐다.
묵상은 일상과도 같다. 영감이 떠오르면 스케치를 한 뒤 그걸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작업실은 따로 없다. 자신의 책상에서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두 달간 십자가를 만든다.
이 집사는 시편 18편 1절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를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작품에 성구를 쓰는 건 지양한다. 십자가를 감상하는 이들이 스스로 묵상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이번 전시회는 세 번째다. 앞으로도 전시회를 계속 이어가는 게 그의 바람이다. 이 집사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십자가를 만들지만, 그 안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이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전시회를 통해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구리 선으로 종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 교회에서 새벽마다 울리던 종소리가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에게 한 가지 당부도 남겼다.
“코로나19로 무척 힘든 시절을 살고 있어요. 이럴수록 기독교인들은 이웃을 배려해야 합니다. 정부 방역에도 협조해야죠. 작은교회들이 무척 어렵습니다. 큰 교회들의 사랑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종소리처럼 은은한 사랑을 전했으면 좋겠어요. 어서 종을 만들고 싶네요.”
인천=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