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반도체와 배터리다. 메모리 반도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LG에너지솔루션, SK이노베이션, 삼성SDI 등 배터리 업체들도 장밋빛 미래가 그려졌다. 힘차게 달릴 일만 남은 것 같던 반도체와 배터리에 급제동이 걸렸다. 초미세공정 등 기술 경쟁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다. 미·중 무역분쟁 등 지정학적 이유로 불거지는 문제라서 우려가 더 커진다.
반도체 상황을 보자. 인텔은 최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 재진출을 선언했다. 인텔은 2016년 파운드리에 뛰어들었다가 2년 만인 2018년 철수한 적이 있다. 그랬던 인텔이 3년 만에 다시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인텔이 파운드리 분야에서 당장 TSMC나 삼성전자와 대등한 수준에 올라서긴 어렵다. 초미세공정에서 인텔의 경쟁력이 뒤처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텔의 움직임을 무시할 수 없는 건 타이밍 때문이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 부족 상황에서 드러난 아시아 편중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TSMC, 삼성전자 등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파운드리는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텔의 파운드리 참전은 미국 입장에선 유용한 카드로 사용될 수 있다. 미국 기업들은 인텔을 지렛대로 삼성전자 등에 협상력을 높일 수 있고, 미국 정부는 삼성전자 등에 미국 내 투자를 늘리라고 요구할 여지도 있다.
당장 12일 미국 백악관이 삼성전자를 호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국가안보 및 경제 보좌관들이 반도체 부족 상황 점검 차원의 회의를 하는데 자국 테크 기업뿐 아니라 삼성전자도 불러들였다. 반도체 공급 ‘협조’를 부탁하는 동시에 미국 내에서 반도체를 더 만들라는 ‘압박’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 발 더 나아가 미·중 무역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미국 쪽에 서라는 신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과 중국 두 나라에 모두 반도체 공장을 가동 중이다. 지금까지는 온전히 경제 논리로 공장을 운영했다면, 앞으로는 지정학적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기업을 모두 고객으로 두고 있는 삼성전자로선 난감할 수밖에 없다.
배터리도 마찬가지다. 전기차는 배터리가 경쟁력의 전부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배터리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배터리 성능과 안정성 등에서 중국 업체와 격차가 크다. 한국 업체에 보조금을 주지 않는 중국을 제외하면 대부분 글로벌 자동차 업체가 한국 배터리를 쓰거나 쓸 예정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기업의 ‘파우치형’ 배터리를 잘 쓰던 폭스바겐이 앞으론 중국 기업이 주로 만드는 ‘각형’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또 지분 20%를 보유한 스웨덴 노스볼트를 통해 배터리를 직접 만들겠다고도 했다. 반도체만큼은 아니지만 배터리도 만들고 싶다고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폭스바겐의 의도대로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막 열린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다른 업체들도 비슷한 행보를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분업은 전 세계 기업들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이 만들고, 제조는 인건비가 싼 중국이 맡는다는 식이다. 이를 깬 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한 정치다. 경제를 정치 논리로 접근하면서 기업들은 더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기업이 외풍에 시달리지 않도록 정부의 측면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다.
김준엽 산업부 차장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