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플랫폼처치의 실현을 위해 1세기 사도행전적 교회의 3대 조건인 영성과 문화, 구조의 회복에 대해 나누고 있다. 지난 영성 편에 이어 교회와 성도의 문화에 대해 고찰해본다.
문화는 동시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삶의 양식, 영성의 외적 표출이자 열매로 볼 수 있다. 플랫폼처치의 문화도 플랫폼처치의 영성에서 기인한다. 1세기 초대교회 교인들은 성령과 구체적으로 동행하고 동역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이끄심과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따라가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였다. 이처럼 성령의 전적인 이끄심과 성령과의 동행을 원한다면 이에 합당한 생활 양식을 가져야 한다.
1세기 사도적 교회와 같은 문화와 생활 양식의 핵심이 무엇인가. 바로 기도와 예배(행 6:4), 금식과 증인의 삶이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문화는 단순했다. 그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단순한 생활양식이 있었다.(행 2:42) 플랫폼처치의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을 통해 말씀을 살아내는 영성을 기르고 성령과 동행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안타깝게도 기도를 잃어버리고 있다. 초대교회의 핵심 영성이 기도였던 점과 그에 대한 열매로 증인의 삶이 이뤄졌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현재 우리는 기도에 대해 잘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우리 자신을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스승 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시고 가장 많이 시간을 드리셨던 기도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는가.
새 부대 구조에 담아 운반하는, 강하지만 유연한 교회가 되기 위해선 기도가 회복돼야 한다. 플랫폼처치는 기도를 알고 동시에 강력히 기도할 수 있는 교회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이다. 기도는 우리를 부활의 증인이 되게 만든다.
플랫폼처치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기도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고난을 겪었을 때 겨우 하는 치우친 기도 방법에 대해 배웠다. 올바른 기도 방법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특별한 고난이 없고 부유하게 지낼 땐 기도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우리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다를 것이 없다.(마 6:32) 이미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주님의 관점에서 받으시기에 심히 좋은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선포하실 때 기도에 대해 가장 많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장은 산상수훈 한가운데 있는 말씀으로, 사실 기도의 장이다. 본문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이자 1세기 사도행전 교회와 사도들의 기도이다. 이방인의 기도와 성도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바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이다.
이제 기도의 신학과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를 해야 한다. 24시간 멈추지 않아도 시간이 모자란 기도, 응답 차원을 넘어 역사가 일어나는 기도, 부흥을 가져오는 기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꿔서 보이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기도를 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장 많이 가르치고 설교하시며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기도와 전도 두 가지였다. 기도하고 전도하는 증인 된 삶은 플랫폼처치의 핵심 문화다. 특히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이자 플랫폼처치의 핵심 문화로 볼 수 있다.
박호종 더크로스처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