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형(刑)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사형 중에 가장 잔인한 사형 방식이다. 십자가는 사형수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아, 모진 고통을 가하면서 서서히 죽음을 맞게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인(死因), 죽음의 직접적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서에 기록된 기록만으로 예수님의 사인을 추정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이 예수님의 사인에 대하여 질식사 혹은 관상동맥 혈전증에 의한 심장마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육체적 측면에서 보면 이 같은 분석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나의 죄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에서는 이 십자가가 굉장히 중요하다.
만일 예수를 믿었지만 이 십자가가 아직도 한 역사의 이야기로 여겨진다면, 혹은 이 십자가를 묵상할 때마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사고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머문다면, 아직 십자가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를 ‘자기 비움’으로 묵상하고 적용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언급하며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빌 2:8)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웠다’라는 뜻의 헬라어 ‘케노시스’를 ‘자기 비움’의 삶으로 연결해서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적용하는 것을 자주 본다.
좋은 일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 역시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묵상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비움을 불교의 공사상에 나오는 무자아, 무소유와 비슷한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불교의 공사상 역시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공사상의 요점을 말하자면, 자성 실체 본성 자아 등과 같이 인간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오직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그렇기에 실제가 본질적으로 없으니까, 비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냥 내 자아라는 것이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자기 비움’(케노시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크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이 되어, 나를 위해서 죽을 만큼 나는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은 실제 하늘의 영광을 가지신 분이다. 예수님은 그걸 너무나 잘 알고 계신 분이다. 그렇기에 이 땅의 피조물인 인간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실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내려오심이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것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더 필요한 것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낮은 자리에 기꺼이 갈 수 있다.
이러한 자는 나를 누구에게 빗대어도 열등하다거나, 부족하다고 결코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 매일의 삶을 가장 높은 자존감으로 살 수 있음을 말하는 역설적 표현이 기독교의 ‘자기 비움’이고 그게 바로 십자가이다.
케노시스는 낮아짐이지만 그 낮아짐은 먼저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것을 아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것을 깨닫는 자가 그 넓고 깊고 광대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푹 젖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