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이 ‘화이트 오스카’라는 오명을 벗어 던졌다. 배우 윤여정과 클로이 자오 감독 등 ‘여성·유색인’이 남성·백인 중심이었던 오스카의 유리천장을 깼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4관왕을 수상한 데서 한발 더 나아가 다양성을 확장했다.
영화 ‘미나리’는 25일(현지시간)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로소 미국 영화로 받아들여 졌다. ‘미나리’로 윤여정이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으면서다. 앞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선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을 받아 아시아계 차별 논란이 일었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1980년대 미국 남부 아칸소주 농장으로 이주한 한인 가정의 정착기를 다뤘지만, 한국어가 주로 나온다는 이유로 ‘외국어 영화’로 분류됐다. ‘미나리’는 이날 여우조연상을 포함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윤여정의 낭보를 잇는 소식은 없었다. 작품상과 감독상은 ‘노매드랜드’, 각본상은 ‘프라미싱 영 우먼’,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 음악상은 ‘소울’이 각각 가져갔다.
중국 출신의 젊은 감독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가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3관왕을 차지했다. 그의 감독상 수상은 여성으로는 두 번째이고 아시아 여성으로선 최초다. 클로이 감독은 “가끔 살다 보면 그것을 믿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지만 그래도 제가 만난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선함이 있다는 걸 볼 수 있었다”며 “믿음과 용기를 갖고 자기 자신의 선함을 유지하는 모든 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비주류인 아시아계 여성 감독이 바라본 미국은 할리우드의 기존 시각과 달랐다. ‘노매드랜드’는 삶의 터전인 도시의 경제가 무너져 미국 전역을 떠도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주연을 맡은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이 영화로 ‘파고’와 ‘쓰리 빌보드’에 이어 세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에서 흑인 인권운동 집단 ‘흑표당’의 리더 프레드 햄프턴 역을 맡은 다니엘 칼루야가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칼루야는 시상식에 올라 “흑인 공동체에서 단합과 연합의 힘을 배웠다”며 사랑과 평화를 외쳤다.
흑인들의 삶에서 기원한 음악인 재즈를 통해 흑인 음악가의 꿈과 그 이후까지 조명한 ‘소울’이 장편 애니메이션과 음악 부문에서 2관왕을 수상했다. 피트 닥터 감독은 무대에 올라 “재즈 음악가들의 삶을 따라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우리 모두를 위한 내 바람”이라며 “우리가 어디 있든 무엇을 갖고 있든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 ‘마 레이니의 그녀가 블루스’로 흑인 최초 분장상을 받은 세르지오 로페즈-리베라와 미아 닐, 자미카 윌슨의 소신 발언도 오스카의 바뀐 분위기를 실감하게 했다. 그들은 “저를 길러주신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흑인이 대학에 갈 수 없어서 YMCA에서 교육받았다”며 “제가 유리천장을 깨는 이 자리에 서서 그분들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언젠가 여성과 흑인 그리고 히스패닉계와 인디언이 이 자리에 서는 것을 보고 싶다. 언젠가 그게 당연한 날이 올 것”이라고 수상 소감을 남겼다.
오스카상이 ‘백인들만의 축제’라는 비판은 5~6년 전 절정에 달했다. 2015년과 2016년 오스카 연기상 후보는 모두 백인으로 선정됐고 미국 전역에선 ‘#Oscars SoWhite’(오스카 너무 하얗다) 운동이 전개됐다. 오스카는 변화를 위해 노력해왔고 올해에는 오스카의 연기상 후보 20명 중 9명이 유색인종이었다.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의 앤서니 홉킨스가 차지했다. 역대 최고령 남우주연상 수상자이자 1992년 ‘양들의 침묵’ 이후 29년 만의 수상이다. 각본상은 ‘프라미싱 영 우먼’의 에머럴드 피넬, 각색상은 ‘더 파더’의 플로리앙 젤레르와 크리스토퍼 햄프턴이 받았다. 유일한 한국 작품으로 단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른 에릭 오의 ‘오페라’의 수상은 불발됐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