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 시인에 따르면 내게는 다소간의 건강염려증이 있다. 누군가 농담 삼아 지어낸 것처럼 보이는 말이지만 건강염려증은 엄연히 사전에 등재된 표현이다. 건강염려증이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양상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될 수 있다. “사소한 신체적 증세 또는 감각을 심각하게 해석해 스스로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고 확신하거나 두려워하고, 여기에 몰두해 있는 상태.”
내 생각에도 건강에 대한 내 염려는 좀 지나친 데가 있다. 야근하던 어느 밤이었다. 몸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한쪽 팔에 불그스름한 반점이 듬성듬성 생겨나는 게 심상치 않았다. 그 길로 회사를 나와 택시를 타고 근처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갔다. 택시 안에서 증상이 한층 심해진다고 느꼈다. 의심 가는 병명을 검색하며 나는 내가 대상포진에 걸렸음을 확신했다. 공포는 더 심해졌고 급기야 병원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도착해서 접수하고 증상을 말한 뒤 지정된 침대에 누웠다. 곁으로 다가온 의사가 이리저리 살펴본 뒤 천천히 말했다. “집에 가서 푹 쉬세요.” “아니, 선생님, 아무래도 저 대상포진인 것 같은데요!” “대상포진 증상은 이렇게 나타나지 않아요. 쉬고 나면 좋아질 거예요.” 집에 가서 안정을 취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증상이 사라졌다. 이런 일이 내 일상에는 자주 일어난다.
세상에는 많은 공포가 있겠지만 몸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감지하는 순간 발생하는 공포는 내게 있어 실존하는 최대치의 공포다. “무시무시한 불행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 들어.” 몸에서 벌어지는 일은 느낄 수 있을 뿐, 알 수는 없다. 감각할 수 있지만 지각할 수 없다. 과잉된 공포에서 출발한 내 왜곡된 인식은 공포의 일상화를 조장한다.
‘피버드림’은 공포소설이다. 내게는 그렇다. 이때의 공포는 윤곽이 존재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공포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의 한가운데에서 전개되는 기승전결이 날카롭게 심장을 조인다. 공포의 전제는 ‘알 수 없음’이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불행의 행로가 어떻게 진행될지, 피해는 얼마나 심각할지, 형상을 가늠할 수 없을 때 공포는 증폭되고 급기야 우리를 제압한다.
소설은 두 사람의 대화로 진행된다. 시골 병원의 침대에 누워 죽어 가는 아만다와 6년 전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가다 마을의 한 여인에게 치료를 받은 뒤 괴물이 됐다는 소년 다비드. 다비드에 대한 이야기에 잔뜩 겁을 먹은 아만다는 딸과 “구조거리”를 유지하며 노력하지만 자신 역시 무언가에 중독돼 죽어 간다.
“정확히 언제 나빠지기 시작하나요.” 언제부터 안 좋아질지 아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그때까진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점은 중요한 정보다. 언제부터 안 좋아질지 알 수 없어서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마니까. 환경오염으로 인해 발생하는 중독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 나빠질지 알 수 없지만 나빠지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파괴한다. 염려증은 윤곽을 헤아릴 수 공포 앞에서 고개 드는 마음의 질병이다.
예술에는 공포를 표현하는 많은 작품이 있다. 손창섭처럼 훼손된 신체를 통해 공포에 휩싸인 내면을 보여 줄 수도 있고 뭉크처럼 절규에 빠진 표정으로 공포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일상의 공포를 가장 절묘하게 드러낸 이미지라면 단연 ‘거품’이라고 생각한다. 김언의 시 ‘거품인간’에는 “공기가 그를 껴안을 것”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거품을 이루는 건 공기다. 거품인간은 공기에 안긴 인간이자 공기를 안고 있는 인간이다.
우리를 안고 있는 것도, 우리가 안긴 것도 비어 있는 무엇이다. 따라서 언젠가 꺼지고 말 거품에 안겨 있는 우리는 윤곽 없는 존재들이다. 맥주잔에 남겨진 자국처럼 흔적만이 거품의 존재를, 거품을 안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희미하게 입증한다.
‘거품인간’이 수록된 시집 ‘거인’의 개정판이 출간됐다. 벌써 두 번째 재출간이다. ‘거인’이 거듭 출간되며 읽히는 여러 이유 중에는 ‘거품인간’이 환기하는 공포의 감각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읽을 때마다 직면하는 진실된 두려움 말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