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의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은 예견됐었다. 그럼에도 한국 영화사에 새 역사를 쓰는 꿈이 현실이 되기를 국민 모두가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지난주, 문화유산 분야에서도 ‘역사’가 쓰여졌다. 대중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한 뉴스였다. 그렇다고 그 중요성이 작은 건 아니었다.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를 에워싼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자는 데 문화재청, 환경부, 울산시, 수자원공사 등 관계기관들이 처음으로 전격 합의를 한 것이다.
합의는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의원실(울산 북구) 주최로 지난 20일 서울에서 열린 ‘반구대 암각화 보존 및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사연댐 물관리 방안 토론회’에서 이뤄졌다. 뉴스가 덜된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운’이 덜했던 탓도 있다. 문화계 뉴스의 초점이 윤여정에 쏠려 있었던 것도 이유의 하나다.
하지만 합의는 ‘문화유산의 오스카’로 평가할 만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가 된다면 그 여정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세계 최초의 고래사냥 암각화’인 반구대 암각화는 등재를 위한 필요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 년의 반 이상이 물속에 잠겨 있다 보니 보존대책이 엉망이라 등재를 위한 충분조건은 갖추지 못했다. 수문 건설로 보존의 전기가 마련이 됐고 세계유산 등재의 길은 이제 탄력을 받게 됐다.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대곡천의 절벽에 새겨진 신석기시대 바위그림을 말한다. 향유고래, 밍크고래, 돌고래 등 여러 고래들이 생물 도감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1965년 사연댐이 건설되며 거의 물에 잠겨 있는 처지가 됐다. 특히 지난해같이 장마가 길어질 때는 암각화는 더욱 그 원형이 깎여나갈 수밖에 없다.
암각화가 학계에 발견된 것은 1971년이다. 당시 수년간 가뭄이 들면서 수위가 낮아진 덕분에 현장 조사를 나왔던 동국대 학술조사단의 눈에 띄었다. 해마다 물에 잠겼다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하며 풍화는 점점 더 심해졌다. 이에 ‘문화연대’ ‘반구대사랑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1990년대 말부터 반구대 암각화 보존 운동을 벌였다. 보존대책의 핵심은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아주 명쾌한 답이지만 관계기관이 모두 합의하는 데 50년이 걸린 것이다. 과거 울산시는 물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며 제방을 쌓자, 물길을 돌리자 등 여러 안을 내놓았다. 키네틱 댐을 건설하자는 희한한 아이디어도 나왔다. 모두 대규모 ‘토목 공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책적 전환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배경은 지방자치단체장인 울산시장과 울주군수가 여당 소속으로 바뀐 점을 우선 꼽을 수 있겠다. 또 민주당 소속인 이 의원의 관심도 일조를 했다고 본다. 2017년부터 댐 관리 주무부처가 개발 중심의 국토교통부에서 보존 중심의 환경부로 바뀐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관심은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 2월 반구대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 등재목록에 오르면서 보존이 절박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게 시민단체의 노력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이제야 우리가 주장했던 원점으로 돌아왔다”면서 “그래도 정부와 지자체가 시민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줬으니 고맙다”고 말했다.
조만간 부처 간 갈등을 조정하는 국무총리실에서 사연댐 수문설치 일정 등에 대해 발표할 것으로 열려졌다. 올해 수문 설치 타당성 조사 용역을 끝내고 내년에 실시 설계를 한 뒤 2023년부터 2년에 걸쳐 수문을 완공하는 일정이라고 한다. 울산시의 목표대로 2025년 반구대암각화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를 희망한다. 그때는 그 과정에서 힘써온 시민단체의 노력도 함께 기억되기를 바란다.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