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의 오른쪽에 메마른 가을 산이 그려져 있다. 능선 위를 수평 방향의 갈필로 그려 음영을 준 탓에 시간이 한밤중임을 알 수 있다. 왼쪽에는 보름달이 환한데 천지사방이 고요해 적막감이 돈다. 가운데 중국식 초옥(草屋) 둥근 창 안에서 글 읽는 선비가 밖을 내다보고 있다. 동자가 왼쪽을 가리키며 뭔가를 아뢰는 순간을 포착한 이 작품은 김홍도(1745∼1806?)가 죽기 1년 전으로 추정되는 61세에 생애 마지막으로 그렸다.
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1007∼1072)가 52세에 지은 ‘추성부’(秋聲賦) 내용을 형상화해 ‘추성부도’(秋聲賦圖·보물 제1393호)라 부른다. 부(賦)는 일종의 산문시다. 구양수는 가을밤 독서하다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느낀 감흥을 동자와 대화 형식을 빌려 글을 지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늙고 병든 김홍도는 이 시에 공감해 바로 이 대목을 스냅사진처럼 잡아냈다. 동자가 바람 소리 나는 쪽을 가리키고 집에서 기르는 학 두 마리도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목을 빼고 입을 벌리고 있다. 낙엽수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마당에는 떨어진 낙엽들이 드문드문 흩날린다.
김홍도는 화면 왼쪽에 ‘추성부’ 일부를 자필로 썼다. 끝부분에 ‘을축년동지후삼일 단구사’(乙丑年冬至後三日 丹邱寫·을축년 겨울 동지 지나 삼 일째 단구가 쓰다)라 적었다. 단구는 김홍도가 말년에 쓰던 호이며 을축년은 1805년이다.
김홍도는 이 무렵 건강이 나빠졌고 생활 형편도 좋지 않았다.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의 1805년 11월 29일자 편지에 “못난 아우는 가을부터 위독한 지경을 여러 차례 겪고 생사 간에 오락가락하였으니 오랫동안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중에 한 해의 끝이 다가오매 온갖 근심을 마음에 느껴 스스로 가련해 한들 어쩔 수가 없다”고 썼다. 같은 해 12월 19일자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는 “너의 훈장 선생 댁에 갈 월사금을 구해 보내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고 했다.
김홍도는 ‘예원의 총수’로 불린 문인화가 강세황의 추천으로 화원이 됐다.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정조)의 초상을 그렸고 후일 정조의 어진도 그리는 등 최고의 궁중 화원이 됐다. 경북 안동 안기찰방에 이어 충청도 연풍현감을 지내며 종6품까지 올랐다. 중인 출신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이었다.
말년의 몰락은 1800년 정조가 죽은 뒤 정국이 일변하며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인물들이 된서리를 맞은 탓으로 추정된다. 그런 상황에서 추성부에 쓰인 구양수의 슬픔을 수백년이 지난 뒤 김홍도가 공명했다. 노년의 비애, 죽음을 앞둔 심리를 추성(秋聲), 즉 가을바람 소리를 형상화한 시에 의탁한 것이다.
‘추성부도’(55.8×214.7㎝)는 연도가 확실한 점, 기량이 최고조였던 말년에 제작된 점, 무엇보다 가로 2m가 넘는 대작인 점 등에서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라는 평가가 많다. 김홍도 작품으로 연도도 적혀 있지 않고 보물도 아니며 크기도 훨씬 작은 ‘공원춘효도’(36.5×70㎝)가 지난해 옥션에서 4억9000만원에 낙찰됐다. 고미술계 관계자는 “수백억원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