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국(1916-2002)은 ‘산의 작가’, 정확히는 ‘추상화시킨 산의 작가’다. 유학 시절 일본에서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환기(1913-1974)와 함께 활동하며 한국 추상화의 길을 개척했다.
왜 산을 줄기차게 그리느냐고 누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떠난 지 오래된 고향 울진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단면, 다채로운 색….”
그는 산의 형세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시켜 색면으로 구성하고 빨강 파랑 초록 등 원색을 쓴다. 그렇게 추상화시킨 유영국의 산 작품에선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처럼 숭고미가 풍긴다. 그러면서도 첩첩산중 우리 산의 맛이 있다. 한국 산 특유의 깊은 산이 갖는 맛이 있다. 그 산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가 나고 자란 ‘강원도(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북에 편입) 울진’의 산이 그랬다.
이인범 상명대 교수는 “나이프로 층층이 색을 쌓고 다시 뜯어냄으로써 자연의 두께와 깊이를 구축해간다. 산의 색면은 표현주의적인 앵포르멜(물감을 끈적끈적하게 바르는 추상) 양상을 드러내면서도 북송대의 기운생동하는 거벽산수의 기억을 불러낸다”고 평했다.
유영국은 울진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 가 경성 제2고보를 다녔다. 졸업을 1년 남겨두고 자퇴해 1935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졸업장이 없어 꿈꾸던 항해사가 될 수 없자 폴 고갱처럼 영혼이 자유로운 화가가 되려고 도쿄 문화학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전위미술의 세례를 받았다. 30년대 일본에서 붓을 버리고 나무판자 조각을 구성해서 붙이는 부조 작업(릴리프)을 그룹전에 발표한 것이다. 8년간의 유학 생활을 접고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결혼한 뒤 선친에게 물려받은 어업을 했다.
미술로 돌아온 것은 김환기 덕분이었다. 47년 김환기로부터 서울대에 신설하는 응용미술과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그는 서울에서 김환기 이규상 등 추상 작가들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화가로서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50년 6·25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1·4후퇴 때 고향 울진으로 가족과 피란 온 뒤 생계를 위해 양조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양조장 한구석에 화실을 마련했지만 창작 욕구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55년 마침내 서울로 돌아와 화업을 재개했고 ‘잃어버린 10년’을 보상받으려는 듯 창작욕을 불태웠다. 국전 초대작가로 추천돼도 거부하며 그가 매진한 주제는 고향 울진의 산과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추상 작품들이었다.
64년 첫 개인전 이래 2~3년 단위로 꾸준히 개인전을 열었는데, 77년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뒤 심장박동기를 달고 사는 처지가 됐어도 98년까지 개인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칭 ‘공부하는 작가’였다. 팔리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작품이 팔린 것은 환갑이 다 된 75년 현대화랑 개인전에서였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거야. 육십까지는 연구만 할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의 혁신의지는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색채와 형태, 깊이감을 탐구한 흔적은 60∼70년대 절정기 작품들에서 드러난다.
유영국의 작품은 100호 이상 대작이 많고 결코 작품값을 낮게 매기지 않아 한때 가장 작품값이 비싼 작가로 꼽혔다고 한다. 당대 최고 컬렉터들만이 유영국 작품을 소장할 수 있었는데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그중 1명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유영국 작품은 유화 20점과 판화 등 187점이다. 대구미술관(5점) 전남도립미술관(2점)에도 작품이 기증됐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