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머니나, 망측하기는. 여자 가슴이 다 나오게 그렸네. 옷이라도 좀 입히든가.”
6·25전쟁 직후인 1954∼55년 무렵이었다. 40대 초반의 서울대 교수 화가 김환기(1913∼1974)에게 삼호방직 정재호 회장이 서울 중구 필동 저택을 신축하며 거실에 장식할 ‘벽화’를 주문했다. 길이만 6m에 육박하는 1000호 크기의 엄청난 대작이었다. 삼호방직은 대구에 공장이 있어 6·25전쟁의 참화를 피한 덕분에 전쟁 특수를 누리며 자유당 정권 시절 최대 방직 재벌로 성장했다. 정 회장은 르네상스 때 부유한 상인들처럼 자택 거실을 당대 인기 작가의 작품으로 장식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백자 항아리와 그 항아리를 이거나 안은 반라의 여인들, 학과 사슴, 쪼그리고 앉은 노점상 여인, 새장, 나무 등 김환기가 50년대에 즐겨 그리던 모티브가 총출동해 밝은 파스텔 색조의 색면 위에 리듬감 있게 배치된 대작이었다. 전남 신안군 안좌도 부농 집안 출신인 김환기는 일본대학 미술학부에서 유학할 당시, 우리나라 유학생 대부분이 사실 묘사 위주의 아카데미즘이나 주관적 색채와 표현을 탐구하는 인상주의 혹은 야수주의에 관심을 가진 것과 달리 추상미술에 끌렸다. 해방 후 국내에서 유영국(1916∼2002) 이규상(1918∼1967) 등과 신사실파를 결성해 한국적 소재를 추상화시킨 비구상 작품을 하며 모더니즘을 추구했다. 이 시기 김환기의 면모를 온전히 볼 수 있는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그림에는 그런데 최종 완성을 의미하는 작가 사인이 없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회장 사모님’이 반라 여인들의 가슴이 드러난 채 있는 걸 문제 삼으며 옷이라도 입혀 가려달라며 간섭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김환기가 더이상 현장에 가지 않고 사인을 하지 않는 것으로 작품성을 지키는 묘수를 찾았다는 것이다. 컬렉터의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는 주문 그림에 사인을 하고 싶지 않은 작가의 자존심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김환기는 51년 부산에서 피란 시절을 보낼 때 항아리를 이고 안은 반라의 여인들이 등장하는 비슷한 그림을 그렸다. 같은 모티브지만 다르다. 그 그림에선 전쟁과 피난의 현실을 은유하기 위해 한 여인의 머리에 인 광주리에는 시장에 내다 팔 생선이 담기고 멀리 바닷가엔 천막촌이 엎드려 있다. 하지만 재벌가 벽화에는 조선 궁궐 건축이 들어서고 쭈그리고 앉은 노점상 여인 앞의 꽃수레도 비현실적으로 비치는 등 전체적으로 장식적이며 풍요로운 이미지를 풍긴다. 재벌 입맛에 맞춰 불우한 현실에 분칠하는 자신의 그림이 싫어서 ‘재벌 사모님’의 무교양을 핑계 삼아 일부러 사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규모와 완성도 면에서 비구상 시기 김환기 최고의 걸작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 그림은 운명이 바뀌어 삼성가로 넘어간다. 삼호방직은 60년대 말 화학섬유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73년 박정희 정권의 ‘반사회적 기업’ 명단에 포함되며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게 되자 그림을 처분한 것이다. 80년대 초반 매물로 나온 이 그림을 이건희 회장에게 중개한 이는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다.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이 회장은 사진만 보고도 바로 구매를 승낙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도 거액인 3억∼4억원에 팔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작품은 85년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사 사옥이 준공되며 로비에 걸렸다. 같은 빌딩 안에는 호암갤러리가 있었는데, 김환기의 이 작품이 전시된 다른 작품들을 압도한다는 지적이 나오자 용인 수장고로 보내졌다. 이후 40여년간 묻혀 있던 이 그림은 이건희 컬렉션이 유족에 의해 지난 4월 말 국가에 기증되면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컬렉션을 기증받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윤범모 관장은 과거 이 그림이 삼성가로 올 때 호암갤러리 수석큐레이터였다. 그는 이 작품을 만약 시장에 내놓는다면 현재 한국미술 최고가인 김환기의 전면 점화 ‘우주’(182억원)를 뛰어넘을 거라고 본다. 일각에선 규모나 내용으로 봐서 40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김환기는 6·25전쟁 직후 전통적 이미지에 바탕을 둔 반구상 작품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56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3년간 작품 활동을 하다 귀국해 홍익대 교수로 재직했다. 63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한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 뉴욕에 정착했다. 그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김환기가 특별한 것은 이 지점이다. 대부분 미술가는 한 번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면 평생 그걸 되풀이한다. 김환기는 안주하지 않는 노매드(유목민)적 열정으로 과거의 양식과 결별하고 추상표현주의의 세례를 받은 전면 점화시대를 열며 세계미술사에 ‘도킹’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기증 덕분에 지금껏 한 점도 없던 전면 점화 대작을 갖게 돼 체면치레를 하게 됐다. 두 그림 모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내년 3월 3일까지 하는 ‘이건희 컬렉션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에서 볼 수 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