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현(1920∼1976)은 1974년 주부클럽연합회가 한국 여성의 표상이 되는 인물에게 주는 제6회 신사임당상을 받았다. 그만큼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청각장애자인 남편 운보 김기창(1913∼2020)에게 5년간 구화를 가르쳐 어눌하게나마 말문을 트게 했고, 예술가로 활동하면서도 1남 3녀의 자식을 잘 키웠다. 장한 어머니, 장한 아내였다. 그는 수상 소감으로 “남편의 말문을 연 사랑과 예술이 인간 승리의 기록”이라며 “곤두박질하듯 살아온 인생”이라고 자신의 삶을 표현했다.
그가 이 상을 받기 직전까지 남편과 자식을 남겨 두고 7년간 홀로 미국 유학을 감행하는 등 전통적 어머니상과 다른 행보를 보였음을 감안하면 신사임당상 수여는 낯설다. 신사임당 이미지는 우리 사회가 그에게 덧씌우고 싶었던 환상이거나 보고 싶은 것만 보게끔 하는 가부장 사회의 색안경 같은 것일지 모른다.
대지주의 딸이자 일본 유학파 화가인 박래현은 사랑에 빠져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기창과 결혼했다. 유학 시절인 1941년 20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부인상’을 출품해 입선한 데 이어 43년 22회 선전에선 특선(총독상)을 한 재원이었다. 43년 시상식 참석차 귀국했다가 화단 스승으로 김기창을 만나 숙명처럼 결혼했다. 장애를 이긴 가난한 화가와 결혼이 자의식 강한 박래현의 인생에 강박으로 작용한 걸까. 박래현은 47년 결혼한 뒤 전시를 할 때면 꼭 김기창과 함께하는 부부전 형식을 취했다. 20대에 선전 추천작가의 반열에 오를 만큼 화단의 중추가 된 김기창의 어깨에 올라타는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예술가로서 독자적으로 서지 못하고 늘 ‘김기창의 아내 박래현’으로 불리는 그늘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기록이 입증하듯이 박래현은 독자적인 입지를 굳힌 작가였다. 56년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과 ‘노점’으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각각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6·25전쟁 때 군산으로 피란 간 시절부터 대상을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입체파적인 시도를 하며 동양화의 현대화를 모색한 게 빛을 본 것이다.
박래현의 작품은 수묵산수화가 압도적인 당시 미술계에 동양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호평받았다. 젖먹이까지 둔 네 아이의 엄마였는데도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기 위해 키보다 큰 2m 남짓 대작의 화폭에 붓을 휘둘렀을 뜨거운 열망이 상상된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61년에는 여성화가로서 국전 심사위원에 올랐다.
박래현은 그해 남편과 함께 참여한 백양회에서 다른 한국화가들과 해외 순회전을 하는 것을 계기로 아시아 미국 유럽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특히 미국에 부는 추상화의 물결을 보면서 추상화적 실험으로 치닫는다. 추상화가 세계적 추세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 결과 60년대 초반에는 당대 한국 화단을 휩쓴 앵포르멜(끈적끈적한 비정형의 유럽 추상미술)의 영향을 받아 번지기 기법의 색채 추상이 등장했다. 60년대 후반 들어서는 점점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하며 ‘띠 추상’ 시기를 열었다. 이렇듯 실험적인 면모에서 아내 박래현은 남편 김기창을 앞섰다.
세계여행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안에서 박래현이 남편의 자장을 벗어나 탈주하는 출구가 됐다. 박래현은 67년 서양화가 김인승 김정숙과 함께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선정됐다. 비엔날레 참석차 브라질을 방문한 뒤 남편과 함께 남미와 미국을 여행했다. 이 여행이 계기가 돼 박래현은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그곳에서 아카데미를 다니며 판화를 익힌 것이다. 자신이 살던 공간을 벗어남으로써 박래현은 김기창의 세계도, 한국화도 벗어나 새로운 미술 세계에 도킹할 수 있었다. 47세 남편과 자녀를 고국에 두고 우주로 날아간 중년 여성이었다. 안타깝게도 박래현은 74년 귀국했다가 암이 발병해 56세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이건희컬렉션 한국미술명작’ 전에는 박래현이 도쿄 유학생이던 22세에 그린 ‘여인’(1942)이 나왔다. 그는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조시비) 일본화부에 입학한 이듬해인 41년 선전에 ‘부인상’으로 당선됐는데 이 작품은 그 후 그린 것이다. 의자에 앉은 한복 입은 여인의 뒷모습을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다. 신체의 동작과 옷의 주름을 전통적인 선묘로 표현해 단아한 맛이 나고 옷에 그려진 무늬, 쪽진 머리의 머리숱 표현이 섬세하다. 옷의 흰색과 머리의 검은색 대조, 뒤돌아선 포즈에선 과감함이 묻어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한국 근대화가의 작품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건희컬렉션을 통해 박래현의 40년대 초기 작품이 기증돼 근대 미술 연구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박래현 작품은 총 8점이다. ‘여인’ 외에 입체파적인 실험을 하던 50년대에 그린 ‘탈’(1958) ‘밤과 낮’(1959)이 있다. 모두 여인들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입체파적인 화면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붓질에서는 이전과 달리 추상적인 격정이 묻어난다. 이렇듯 박래현은 유학시절부터 50년대까지 여성 인물화를 많이 그려 ‘여성 풍속도 화가’로도 불렸다. 그런 그가 60년대를 고비로 추상으로 치달으며 과거와 결별한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박래현이 완전히 추상의 세계로 접어든 시점의 작품은 없다. 화가로서 초심을 보여주는 작품이 갖는 의미를 곱씹으며 추상 작품이 없는 아쉬움을 달래야 할까 보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