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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불운했던 천재 조각가… 그의 시선은 현실 너머 세계로

조각가 권진규의 ‘자소상’(1967). 어깨를 깎아낸 삼각형 몸체를 하고 눈은 먼 곳을 향한 듯한 인물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권진규는 흙으로 형체를 빚은 뒤 구워내는 테라코타 조각이 트레이드 마크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곡마단’(1966).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코메디’(1967).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문’(1967).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조각가 권진규(1922∼1973)는 1959년 일본 활동을 접고 귀국했다. 그는 11년 전 일본에 유학 중인 형이 폐렴으로 입원하자 간병을 하기 위해 건너갔다. 이듬해 봄 형은 세상을 떠났지만, 형의 유해만 보내고 일본에 남았다. 해방 전에 일본에 유학 왔지만 강제노역을 해야 할 처지가 돼 무산됐던 조각가로서 꿈을 키우기 위한 결기였다. 49년 제국미술학교 후신인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해 졸업했다. 이과전에 출품해 거듭 상을 받았고 서양화과 후배 여학생 오기노 도모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일본 미술계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런 그가 귀국을 결정한 것은 스승 시미즈 다카시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서였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작은 집을 구한 뒤 아틀리에를 손수 지었다. 대작을 소화할 수 있게끔 천장을 높게 했고, 작품 보관용 다락방도 마련했다. 테라코타(구운 흙)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우물을 파고 가마를 설치했다. 그만큼 의욕에 넘쳤다. 특히 돌에서 벗어나 흙으로 조각 재료를 탈바꿈하면서 무한과 같은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돌이나 브론즈(청동)는 썩지만 테라코타는 썩지 않는다. 불로 구울 때 발생하는 우연성이 재미있고, 마지막 과정을 남에게 넘겨주지 않고 작가의 손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 좋다.”

그는 테라코타로 말 소 등 동물과 인체 두상을 즐겨 빚었다. 고향 함경남도 흥남이 고구려의 옛 땅이어서일까, 유난히 말머리를 많이 빚었다. 머리만 뚝 떼서 말의 이미지를 단순화시킴으로써 구상이면서도 추상처럼 대상의 본질을 끌어냈다. 인체 두상은 ‘지원’ ‘희정’ ‘상경’ ‘영희’ ‘홍자’ 등으로 불렸던 주변 사람을 모델로 했다. 이를테면 영희는 부엌살림을 도와주는 여성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을 조각함으로써 흙인데도 피가 도는 것처럼 살아 있다. 인체 조각은 대체로 어깨를 깎아버린 삼각형 몸통을 하고 꼭짓점 부분에서 목을 길게 빼서 어떤 근원을 향하는 것 같다. 눈빛은 먼 곳을 향해 고정돼 시간이 영원처럼 정지된 듯하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자소상도 그런 인체 조각의 특성을 갖고 있다. 삼각형의 몸통을 하고 눈빛은 현실 너머의 세계로 향한 듯하다. 그러면서도 목은 과도하게 굵어 어떤 의지가 읽힌다. 그는 구상 조각뿐 아니라 추상 조각, 부조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흙으로 빚었다. 이 시기에 그가 얼마나 희열에 차서 창작에 몰두해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권진규의 조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1965년 첫 개인전은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불행의 단초는 그의 귀국에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한국 미술계는 조각을 전공해서는 기념 동상과 기념비 제작 외는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한국에서 개인전이 실패한 것과 달리 68년 일본 도쿄의 화랑에서 가진 개인전은 호평을 받았다. 요미우리 신문은 “형태를 극단으로 단순화해 얼굴 하나 속에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으며 중세 이전의 종교상을 보는 것처럼 감정이 고조돼 있다”고 평했다.

개인사는 불행으로 점철됐다. 광산업체를 경영했던 부친 사후 집안의 사업은 쫄딱 망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일본에 두고 온 아내와는 합의 이혼했다. 세상사를 잊듯 창작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71년 명동화랑 김문호 대표가 개관전으로 과감하게 권진규 개인전을 마련해줬지만 미술계는 여전히 냉담했다. 더는 버티기 힘들었을까. 73년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란 유서를 남기고 황망히 먼저 갔다.

사후 시장의 평가가 달라졌다.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은 “권진규 조각가는 이경성 등 당대 미술평론가들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한 조각가였다. 하지만 컬렉터 사이에서는 테라코타가 흙이라 깨진다는 인식이 있었고 눈빛이 너무 강렬해 섬뜩한 느낌을 주기에 미술관이 아닌 개인은 잘 소장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눈 밝은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샀고 컬렉터 이건희 회장도 그중 한 명”이라고 했다. 그렇게 꾸준히 모은 컬렉션을 바탕으로 88년 호암갤러리에선 권진규 15주기 회고전이 열렸다. 당시 관람객 7만명이 운집하는 등 대성황을 이뤘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권진규 조각은 24점이나 된다. 장르도 구상 추상 부조 등 다양하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은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지만, 인간의 자식은 언젠가 모두 죽지 않느냐. 내가 만든 자식인 작품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작가는 생전 이런 말을 하며 예술가로 사는 고단함을 달랬다. 유족인 여동생 권경숙씨는 유지를 지키고자 미술관 건립 의지가 있는 독지가를 찾아 나섰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나중에는 대부업체 수장고에 담보로 잡혀 있기까지 했다. 유족은 대부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법원은 40억원 받고 작품을 돌려주라며 유족 손을 들어줬다.

그 작품들 상당수가 올해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됐다. ‘자소상’ ‘도모’ ‘기사’ 등 조각 96점을 포함해 140여점을 기증했다. 권진규가 남긴 자식들은 컬렉터 이건희의 기증으로, 유족의 기증으로 국민 품에 안겼다. 동선동 아틀리에는 유족이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해 시민에 개방한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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