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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꾸밈없는 절제의 미 추구 ‘한국 추상 조각 선구자’

한국 최초의 추상조각으로 평가되는 ‘새’(1953). 김종영미술관 제공


철을 용접한 추상 조각인 ‘작품 58-3’(1958). 김종영미술관 제공


기와를 떠올리게 하는 나무 작품 ‘70-1’(1970).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조각가 김종영은 목재 석재 금속 석고 등 온갖 재료를 구사했지만, 그의 조각이 주는 졸박한 맛은 나무 조각과 돌 조각에서 많이 난다. 특유의 깎지 않은 아름다움이 자연 그 자체의 재료인 나무와 돌에서 잘 발휘되기 때문이다.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작품 79-8’(1979)도 졸박한 맛이 한껏 살아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은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새’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그런데 부리도 꼬리도 없었다. 빨랫방망이를 깎다 만 것 같은 이 작품은 “관중을 무시한 자기도취”라는 혹평을 들었다. ‘새’는 지금 한국미술사 최초의 추상 조각으로 인정받고 있다. 추상이 낯설었던 그 시대에는 이런 모욕을 받아야 했다.

김종영은 동시대 다른 조각가들이 로댕의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인 것과 달리, ‘새’가 보여주듯 추상 조각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한국 조각의 선구자’에 더해 ‘한국 추상 조각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김종영은 경남 창원의 사대부 집안 장손으로 태어났다. 창원은 400년간 김해 김씨의 세거지였다. 김종영의 생가는 한동네에 살았던 이원수 선생이 쓴 동요 ‘고향의 봄’에서 ‘울긋불긋 꽃 대궐’로 묘사한 그 집이다. 김종영은 5세 때부터 평생을 처사로 지낸 부친 성재(誠齋) 김기호로부터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김종영은 서울에 유학 와 휘문고보에 다니던 시절 미술 선생님이던 장발의 영향을 받아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했다. 장발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을 나온 유학파로서 장면 전 부통령의 동생이다.

할아버지에게는 법률을 공부한다고 속이고 갔는데 곧 들통이 났다. 진노한 할아버지를 설득해 준 이가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담아 김종영은 ‘또’라는 뜻의 우(又)를 아버지의 호 첫 글자에 붙여 자신의 호를 우성(又誠)이라 지었다.

김종영은 일본 유학 시절 학교 수업 시간엔 하는 둥 마는 둥 했고, 외려 하숙집에 와서 프랑스 조각가 부르델, 독일 조각가 콜베 등 서양 작가의 화집을 보는 걸 즐겼다. 인체 조각에 국한된 도쿄미술학교 조소과의 화풍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귀국 이후 삶은 대체로 순탄했다. 48년부터 정년퇴직하던 80년까지 서울대 미대에서 조각과 교수로 지냈다. 서울대 미대는 해방 이후 장발이 중심이 돼 출범했다. 6·25전쟁 중이던 53년 5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콩쿠르에 ‘나상’(裸像)을 출품해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삶을 고뇌하는 듯 턱을 괸 여인의 이미지를 양감을 살려 조각한 작품이었다. 49년부터 80년까지 국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추천작가 등을 지냈다.

생전 개인전은 두 번만 했다. 작품을 팔기 위해 애면글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성정 자체도 그랬다. 첫 개인전이 74년 회갑 때 열렸다. 두 번째 개인전은 80년 덕수궁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초대전이다. 최초의 조각가 초대전의 주인공이 될 만큼 미술계의 중추로 평가받고 있었다.

박정희정권 때 조각가들은 정부로부터 기념 동상과 기념비 등을 수주하면 떼돈을 벌 수 있었다. 김종영도 많은 제안을 받았지만, 다 거절하고 겨우 세 점만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서울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 국민성금으로 제작한 삼일독립선언기념탑이다. 온 힘을 기울여 만든 이 작품이 작가와 협의 없이 공원정비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무단 철거된 뒤 삼청공원에 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종영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지병이 악화돼 2년 후 세상을 떠난다.

초기엔 인체 조각도 했지만 그는 대체로 인물, 식물, 산, 자연현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를 추상화한 작품을 했다. 목재 석재 금속 석고 등 온갖 재료를 구사했지만, 김종영 작품의 맛은 나무 조각과 돌 조각에서 난다. 김종영 조각의 진면목은 깎지 않은 아름다움, 즉 ‘불각(不刻)의 미’에 있기 때문이다. 불각의 미는 한국 추상 조각 1호가 된 작품 ‘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김종영의 새는 형태면에서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를 연상시킨다. 브랑쿠시의 작품이 금속으로 돼 있으니 재질은 다르지만 나무로도 매끈하게 깎을 수는 있다. 하지만 김종영은 일부러 덜 깎았다. 실제 빨랫방망이를 깎는 둥 마는 둥 해서 추상조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남긴 작품들에는 다듬이돌이나 맷돌을 가져와 최소한의 터치만 가한 것도 있다. 미술평론가인 최태만 국민대 교수는 “형태를 다듬으려고 하지 않는 태도는 여백을 허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그는 가장 적절한 시점에 작업을 멈추었던 것이며 이는 절제를 터득한 선비에게서 볼 수 있는 태도”라고 말했다. 김종영에게 ‘선비 조각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니는 이유다.

이런 작품 세계는 그가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 추사 김정희의 예술세계를 연상시킨다. 물기가 마른 붓으로 최소한의 선을 그어 한겨울 소나무를 그린 ‘세한도’가 말하듯 ‘졸박(拙朴)의 미’를,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대칭과 균형을 통한 팽팽한 긴장감보다 비대칭과 불균형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총 7점의 김종영 조각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는 3점이 나왔다. 용접과 철판을 사용한 추상표현주의 작품도 있지만, 김종영 조각의 진면목은 아무래도 목조각에서 찾을 수 있다. ‘작품 70-1’(1970)은 휘어진 기와 같은 형상으로 무엇을 닮기보다는 공간감과 볼륨감 그 자체를 보여주고자 한다. ‘작품 79-8’(1979)에선 식물의 이미지 혹은 바위에 새긴 전서체 글씨가 떠오른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산 미술평론가로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이경성은 “정열을 내향시키는 조각가”라고 김종영을 정의했다. 필요 이상의 과장을 피하면서 충실함과 밀도를 잃지 않고 작품 하나하나에 생명감이 충만하다고 했다.

이건희 컬렉션은 사실 부부가 함께 모은 결과물이므로 이건희·홍라희 컬렉션으로 부르는 게 마땅하다. 추상 작품들은 대체로 아내인 홍라희 전 리움 관장의 취향인 것으로 전해진다. 유족이 작품을 시장에 내놓지 않아 컬렉션을 많이 하진 못했다. 김종영이 서울대 미대 출신인 홍 관장의 은사라는 점도 컬렉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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