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주의 노부인이 의자에 앉아 화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자세가 자못 당당하다. 조선시대 고관대작이나 가질 수 있던 초상화의 주인공이 됐으니 남부러울 것 없다는 태도다. 쪽찐 머리, 외꺼풀 눈, 꽉 다문 입매에서 많은 소작농을 거느렸을 부농의 안주인이 갖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목 뒤로 드러난 금비녀, 무릎 위에 얌전히 얹힌 손에 낀 금반지, 치마 아래 살짝 보이는 가죽신을 통해 자연스럽게 부를 과시하는 구도를 취했다. 흰 비단 치마저고리는 노년 여성의 기품을 살려주고 저고리 밑으로 뺀 복주머니 모양 붉은 노리개와 푸른색 줄의 색깔 대비가 싱싱해 노부인의 나이를 몇 살이라도 젊어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낸다.
20세기 초 최고의 초상화가로 인기를 누리던 석지(石芝) 채용신(1850~1941)이 전라도에서 한 부농의 아내를 그린 작품이다. 칠순 등 특별한 날을 기념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초상화를 그리는 값은 전신상에 100원, 반신상에 70원이었다. 그 무렵 임실에서 소 한 마리를 82원에 거래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농가의 보물인 소 한 마리는 갖다 바쳐야 초상화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서구 근대 문명이 수용되던 시기에 서양의 명암기법과 동양의 세필묘사를 융합해 독창적 초상화의 세계를 연 채용신이 82세이던 1932년에 그렸다. 채용신은 당시로선 드물게 91세까지 장수했는데, 기량이 무르익던 말년의 대표작인 이 그림은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하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전에서 볼 수 있다.
채용신은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원래 무관 집안으로 전주에 살았는데, 할아버지 때부터 서울로 이사해 살았다. 그 역시 36세이던 1886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해 의금부 도사 등 여러 관직을 지냈고 49세 때이던 1899년 수군첨절제사를 마지막으로 무관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향인 전주로 물러나 지내던 그를 조정에서 선원전(창덕궁 안에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곳)에 걸 태조어진을 그릴 화사로 불러들였다. 무관으로 평생을 살아온 채용신은 그렇게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어진 모사를 주관하는 주관 화사로 발탁됐다. 구한말 3대 화가로 꼽힌 조석진과 함께였다는 점에서 낭중지추였던 실력이 상상된다. 1900년 그의 나이 오십이었다. 무관으로만 살아오던 채용신의 그림 실력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고 그림 팔아 빚을 갚기도 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태조어진이 완성되자 흡족했던 고종은 자신의 어진과 함께 16명의 기로소(조선시대 70세 이상 연로한 고위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신료들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했다. 덕분에 1905년 충남 정산군수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종황제어진’(1920)을 보면 조선시대 초상화와 닮은 듯 다르다. 당시에 유입된 서양화 기법의 영향을 받아서 조선시대 초상화에는 없던 명암법이 얼굴과 옷 주름에 등장한다. 이 초상화는 화사로 지내던 1902년 무렵 제작된 것이 아니다.
미술사학자 조은정씨는 “처음 제작한 고종어진은 소실돼 나중에 다시 제작됐다. 고종 초상은 궁중용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소장용으로 여러 점을 주문받아 그렸다”면서 “당시에는 고종이 국난극복의 상징처럼 여겨져 고종의 사진과 초상화를 소장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산군수로 있을 당시 우국지사 면암 최익현을 만나 그의 초상화를 그려준 게 계기가 돼 여러 유학자, 항일지사의 초상화를 그렸다. 어진화사 출신은 그의 브랜드가 돼 익산 김제 정읍 등 전라도 지역을 돌며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렸다. 명성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1917년에는 일본으로 초청받아 그곳에서 현지인의 초상화를 그려줬다.
1920년대부터는 상황이 달라진다.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부농이 등장했다. 이들은 부부 초상화를 함께 갖기를 원했다. 조선시대 초상화 전통에선 있을 수 없던 일이 일어났다. ‘노부인 초상’처럼 여성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채용신 초상화에는 ‘서병완 부부 초상’(1925) ‘황장길 부부 초상’(1936) 등 남편과 아내가 각각 초상화를 제작한 사례도 있다. 돈의 힘은 그렇게 무섭다.
70대에 들어서며 기력이 떨어진 채용신은 1920년대에 정읍 신태인에 거처를 마련해 ‘채석강도화소’를 차렸다. 간판 이름에서 마케팅 감각이 느껴진다. 채석강도화소의 석강(石江)은 고종이 내려준 호다.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에 대한 자신과 타인의 글을 담은 ‘석강실기’(石江實記)에 따르면 고종은 자신의 어진을 그리던 채용신에게 호를 물었고 ‘석지’라고 답하자 “네가 사는 곳이 부안에 가까운데 그곳에 채석강이 있지 않은가. 호를 석강이라 하라”고 명했다. 공방 이름에 고종이 내린 호를 쓴 것은 어진화사 출신이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강조하는 효과도 있다.
도화소는 일종의 가족공방으로 아들 손자와 함께 온 집안이 동원돼 초상화 주문 제작에 응했다. 막내아들은 초상화 주문을 받으러 돌아다니고 완성되면 큰아들이 고객의 접대와 전송을 담당했다. 특히 손자 규영은 그림 실력이 좋아 채용신과 합작 초상화도 남겼다.
초상화 주문이 들어오면 계약을 하고 선금을 받은 후 제작했다. 그리는 데는 두 달 정도 걸렸다. 광고 전단도 돌렸다. 광고 전단에는 어진화사 출신이라는 이력과 함께 초상화 가격을 명기했다. 흥미로운 것은 초상화 제작 때 사진을 보내주되, 없으면 사진사를 보내 찍어주겠다고 명기한 것이다. 아들 중에 사진사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채용신의 초상화가 사진 같은 실재감을 주는 이유 말이다. 채용신뿐 아니라 당대 초상화가로 유명했던 이당 김은호도 초상화를 그릴 때 사진을 활용했다. 한국에서 사진관은 1882년부터 일본인 사진사들이 국내 유입되면서 생겨났는데, 1920년대가 되면 한국인 사진사들도 가세하면서 상류층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사진이 대중화됐다.
그런데 채용신의 초상화는 사진 같으면서도 전통 초상화의 기법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전통 초상화가 갖는 신분 상승감을 동시에 준다. ‘노부인 초상’을 보면 옷 주름과 얼굴과 목의 경계에는 명암을 넣어 서양화 기법을 쓰면서도 얼굴 피부 표현에서는 가는 붓을 무수히 그어서 깊이감을 만들어낸다. 채용신은 별세하고 2년 뒤인 1943년 화신백화점에서 유작전을 열 정도로 전국적인 명성을 가졌다.
최근 마이아트 옥션에서 채용신의 초상화 한 점이 낙찰됐다. 73세이던 1933년에 그린 이 초상화에선 관복을 입은 주인공이 입꼬리를 올리고 슬며시 웃고 있다. 근엄한 표정으로 그려지던 전통 초상화와 달라진 세태를 반영한다. 채용신의 초상화는 인물 표정에서도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담고 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