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Hela)'.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사람 중 이 이름을 모르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자궁경부암에 걸렸던 31세 흑인 여성인 헨리에타 랙스의 몸에서 추출한 종양조직으로 만든 실험용 세포의 이름이다. 흔히 헬라 세포주(Cell Line)라고 부른다. 헬라 세포주의 역사는 현대 자궁경부암 연구와 결을 같이한다. 1951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병원에서 개발돼 7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세포주다. 이 세포주를 이용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만 2개가 나왔다. 논문은 6만건, 관련 특허는 1만1000건이 넘었다.
세포를 배양해 연구에 활용하는 것을 통틀어 '배양세포'라고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연구개발 역시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생명과학 연구자들을 위한 배양세포의 안정적 공급도 한층 더 중요해지고 있다.
배양세포의 기본 ‘세포주’
세포는 생명체의 기본 단위다. 세포 배양기술은 이런 동식물의 세포를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증식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역시 세포주다. 세포를 적절히 처리해 실험실에서 계속 증식·배양해 사용한다. 주로 실험에 필요한 세포를 떼어내어 ‘암세포’로 바꾸는 방식으로 만드는데, 끝없이 증식하는 암세포의 특징을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항상 무한정으로 증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유전자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식 횟수가 제한적인 ‘유한 세포주’와 무한정 증식이 가능한 ‘불멸화 세포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유한 세포주는 20~80번 이상 증식을 반복하면 더는 실험에 쓰기 어렵다. 반면 불멸화 세포주는 무한정으로 복제할 수 있다. 헬라 세포주도 불멸화 세포주다.
생명과학 연구 중에는 여러 종류 세포주의 세포 반응을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의약 분야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항암제, 세포 치료제 등을 개발할 때 필수 소재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건 결국 세포의 이상 반응이나 괴사, 변이 등이 우려된다는 의미인데, 이런 과정을 세포주로 미리 실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별된 약품을 동물실험, 임상시험(인체 검증)으로 재차 검증한다면 전체적인 개발 기간을 줄일 수 있다.
드물게 일부 세포주는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바이러스를 심어 키울 목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과거에는 달걀 등을 이용했는데 최근에는 바이러스 배양용 세포주를 만들어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바이러스는 생명과학 분야 연구에 필수적인 재료다. 유전자 교정 등을 위해 유전 정보를 잘라 넣거나 옮기는 과정에서 모두 바이러스를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자유자재로 배양할 수 있다면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성 질환의 백신 및 치료제 개발도 활력을 띨 것으로 기대된다.
미래 인공장기 시대 ‘배양세포’로 연다
세포 배양기술을 이용하면 세포주 이외에도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미래에 주목받을 세포 배양기술로 꼽히는 것은 입체, 즉 3차원 세포 배양기술이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스캐펄드(Scaffold)’라 부르는 인공 구조물 속에 배양세포를 원하는 형태로 길러낼 수 있다. 맞춤형 항암제 반응 실험 등 훨씬 더 다양한 연구개발이 가능하도록 돕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차세대 생명과학기술로 꼽히는 ‘오가노이드’(실험용 초소형 생체 기관)를 인공 배양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각종 신약 실험 등에 이용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공 장기 개발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일명 만능세포로 불리는 줄기세포를 오가노이드와 동시에 활용하면 손상된 인체 조직 복구도 가능해진다. 간 기능이 약한 사람의 줄기세포를 이용해 ‘간 오가노이드’를 만들고, 이를 모아 주입해 간 기능 회복을 기대하는 식이다.
미국 인디애나대 의대 두경부외과 전문의 칼 콜러 박사팀은 2017년 줄기세포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내이(內耳)’ 조직을 오가노이드 형태로 배양해 내는 데 성공했다. 소리 정보를 전달하는 ‘유모세포(달팽이관)’와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전정기관(세반고리관)’을 모두 갖추고 있는 최초의 오가노이드였다. 인간의 청각기관 발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연구 재료란 평가가 나온다. 연구팀 관계자는 “내이 질환 치료제 개발에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배양세포를 모으는 은행이 있다
문제는 배양세포를 연구자들에게 어떻게 공급하느냐다. 연구자들이 실험에 필요한 각종 세포를 직접 배양하는 경우가 많은데, 업무 효율도 문제지만 실험 신뢰도가 낮아질 수도 있어 치명적일 수 있다. 세포주에 유전자 변형이나 오염이 심심찮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U87MG’라는 뇌 세포주다. ‘표준 뇌 암세포’ 중 하나로 1966년 스웨덴 웁살라대 연구진이 확립한 이후 지금까지 약 2000편의 생명과학 논문에 활용됐다. 그러나 웁살라대 연구진은 2016년 U87MG의 신뢰성에 큰 문제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여러 실험실에서 U87MG 유전자의 변이를 확인한 것이다. 이는 그간 U87MG로 실험했던 연구의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뜻으로도 통한다.
이런 문제로 여러 나라에선 국가적으로 배양세포를 관리하며 과학자들에게 공급하는 ‘세포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비영리단체 ATCC가 유명하다. ATCC의 1년 예산은 2017년 기준 약 1200억원. 전문 인력 500여명이 참여해 배양세포를 관리해 공급하고 있다. 확보하고 있는 세포주는 2018년 기준 150종 3600주로 사실상 세계 최대 규모다. 가까운 일본도 배양세포 은행이 탄탄하다. 이화학연구소 산하 BRC는 2018년 인력 415명으로 미국에 필적하며, 세포주 보유 수도 1만5590주에 달해 숫자 면에서는 가장 많다. 한국은 이에 비하면 초라하다. 국내에서 배양세포 은행은 두 곳으로, 1991년 설립된 서울대 한국세포주은행(KCLB)과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산하 생물자원센터(KCTC)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두 곳 모두 수십명의 인력이 수백개의 세포주만을 관리하고 있다.
배양세포는 고부가가치 산업인 ‘생물의약품 산업’에 속한다. 무엇보다 남이 대신해 주기 어려운 분야다. 한국 의료에 적합한 배양세포는 우리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 연구개발 역량을 뒷받침할 기반 시설인 만큼 아낌 없는 투자와 관리가 필요한 부분이다.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