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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얘는 사람 아니냐?”





내 인생의 책으로 만화책을 고른 이유는 튀려는 마음 때문이 아닙니다. 자랑할 독서량은 없지만 그간 신학과 종교철학을 배우면서, 또 선교단체 실무자이자 청소년 담당 교역자로 일하면서 멋지고 뜻있는 책을 꽤 접했습니다. 쟁쟁한 책들을 두고 고심했고, 욕심 반 소명 반으로 제 첫 번역서 ‘내일의 교회’를 알릴까도 싶었지만, 역시 이 만화책 한 권을 이길 책이 없더군요. 정확히는 이 한 마디를 이길 책이 없었습니다. “얘는 사람 아니냐?”

이는 ‘함석헌 수필선집’ 가운데 ‘나의 어머니(그건 사람이 아니냐)’에도 고백처럼 나오는 장면입니다. 함석헌(1901~1989·오른쪽 사진)의 모친께서 어린 그를 꾸짖으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 그 시절, 집안 장손이 점찍어둔 오이를 감히 먹었다는 이유로 석헌은 여동생을 구박합니다. 아들이 최고인 시대, 그는 당연히 어머니가 제 편을 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소년에게 별안간 호통을 치십니다. 이 부족한 딸도 너처럼 사람 아니냐고 말입니다. 함석헌은 그 한 마디를 평생 잊지 못했고, 그런 어머니가 자기 사상과 삶의 반석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여동생이 있는데 자주 싸워서, 실은 때리고 울려서 더 생생하게 들렸던 걸까요.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 만화의 짧은 대목일 뿐이지만 지금껏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여성, 어린이와 청소년, 장애인, 극빈층, 재소자, 이주민, 난민, 성 소수자, 무슬림에 대해 생각은 바뀌어왔고 또 바뀌어 가고 있지만, 특히 제가 안온함에 겨워 그들과는 다른 존재인 척할 때 이따금 떠올라 죽비처럼 저를 내려치고 있으니 인생의 책이라 할만하지요.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한 것은 풍요로운 사상과 철학이기 이전에 저 어머니, 저 한 마디일지 모릅니다. 신앙인으로서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당대의 아들들 앞에서 병자와 세리, 창녀를 감싸시며 똑같이 물으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아와 과부, 빈자와 나그네를 아끼시던 하나님은 그 한 마디의 사랑을 제대로 보이시려고 육신을 입으신 게 아닐까요. 야훼께서 늘 내 편을 드신다던 이들은 꼭 소년 석헌처럼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찾아 헌책방을 돌았지만 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인간 함석헌을 처음 만나기에도, 근현대사 속 기독교를 가볍게 살피기에도 좋은 책입니다. 다행히 공공도서관에서 발견해 다시 읽었습니다. 펴보니 해당 장면은 제 기억보다 훨씬 앞에, 1장이 시작되자마자 나옵니다. 둥글게 그려진 어머니의 표정도 제가 되뇌던 모습보다 한결 온화합니다. 다음에 저 물음을 상기할 때는 그만큼 조금 덜 아프겠지요. 이 글로 더 많은 분이 같은 물음을 싸안고 씨름하게 된다면 더욱 괜찮아질 것이라고 봅니다.

김준철 디렉터(한국루터란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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