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 전반에 ‘고객이 왕이다’라는 관념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돈 몇 푼 쥐여줬다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고객은 점점 사라진다. 그보다는 아무리 돈을 내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한다. 돈 받는 사람은 노예나 하인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마스터, 장인, 생산자이다. 돈을 냈다는 이유로 행패를 부리거나 주인에게 함부로 대하며 타인의 인격을 짓밟아도 좋은 시대는 많은 부분에서 저물어가고 있다.
특히 근래에는 오히려 ‘사장님이 왕’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인스타그램 등에서 핫한 카페나 식당 등에는 예약 없이는 갈 수도 없고, 가서 고유의 문화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문전박대당하기 일쑤다. 소비자는 돈을 쥐고 있다는 입장에서는 갑일지 몰라도 아주 특별하고 고유한 서비스를 갈망할 때는 을이 된다. 그럴 때는 오히려 그런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갑이 된다. 특별한 공간이나 서비스의 공급은 한정돼 있는데 수요가 넘쳐나는 순간, 관계는 역전된다.
갈수록 이런 역전 관계가 늘어나는 것은 많은 사람이 특별한 소비적 경험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품이나 외제차 등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재화가 한정돼 있다. 아름다운 사진을 건질 수 있는 카페에는 자리가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특별한 것들을 원한다. 특별한 것을 소비할 때 자기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무엇을 소비하느냐가 자아 정체성의 핵심을 차지하는 소비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돈을 낸다는 이유만으로 왕이 되는 문화란 그저 저급한 문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가 돈을 내는 모든 순간에도 그에 대한 노동력과 창의성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고작 돈 몇 푼 드렸을 뿐인데 이렇게 정성을 다한 음식을 내줘서 고맙다,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줘서 고맙다, 이런 고유한 행복을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인간들이 사는 인간다운 세상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
물론 한편으로는 노키즈존처럼 업주의 소비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차원 또한 존재할 것이다. 가령 수요 폭발로 갑이 되는 업주의 입장이라도 장애인, 노인, 어린아이, 다른 인종을 마음대로 배제하는 건 또 다른 차원에서 비인간적 권력 행위이다. 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소비자가 왕이 아니듯이, 업주도 왕이 아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건 서로가 돈의 권력이나 수요공급의 법칙 아래 발생한 권력 앞에서 ‘인간적인 지점’을 남겨 놓는 것이다. 모든 거래 또한 인간과 인간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서 너무 왕처럼 보이는 위치가 있다면, 그 위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늘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왕을 제도적으로 폐기하기로 합의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현실적으로 부자나 권력자 등 왕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존재를 대놓고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왕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법적으로 보면 기존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나 ‘재산권’ 중심의 사회였다면, 앞으로는 점점 더 ‘인격권’이 중시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천민자본주의란 돈이나 재화가 인격을 압도하는 사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아무리 큰돈 앞에서도 지켜져야만 하는 인격이 있다고 믿는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당신들은 모두 나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하나의 온전한 인격이다.
정지우(문화평론가·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