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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각, 새로운 가치 알리는 일이 기쁨이자 보람”

타일러 라쉬가 지난달 1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사에서 인터뷰하다 포즈를 취했다. 그는 12년째 한국에 살면서 방송 강연 출판 전시회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권현구 기자


2020년 발간한 환경에세이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이 책의 표지 그림은 그가 직접 초안을 그렸다.


타일러 라쉬(33)는 미국 출신의 방송인이다.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언어 학습의 꿀팁을 알려주는 ‘국민 영어선생님’이기도 하다.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활동가로서 환경을 주제로 한 책을 내고 그림 전시회도 열었다. 한국에서 그의 삶은 그야말로 지루할 틈이 없어 보인다.

지난달 1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사에서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달려온 타일러를 만났다. 새해에도 그는 뭔가를 하면서, 또 다른 계획을 세우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싶었다. 내년 말까지 이뤄내고 싶은 것들을 적어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연초에 많이 가졌다”고 말했다.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재정 관리와 건강 관리’라는 명확한 답이 돌아왔다. 그는 “배움은 계속돼야 하는데 항상 익숙한 방향으로만 공부하거나 지식을 얻으려고 하면 인생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며 “이달 초부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뭐든 알고 있을 것만 같은 그가 두려워하는 건 뭘까. 바로 숫자와 기계다. 타일러는 “숫자에 대해선 눈을 감고 무시하려 하지만 계산 자체를 꺼리니 돈 관리를 똘똘하게 할 수 없을 것 같더라”며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재정 분석에 대한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다”고 했다.

2020년 환경에세이 ‘두 번째 지구는 없다’를 낸 후 그에겐 ‘환경작가’ ‘환경운동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타일러는 “환경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게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일 뿐 전문가는 아니다”며 “모두가 그렇게 돼야 한다고 본다면 특별히 내게 어떤 ‘라벨’을 붙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밝혔다.

그가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게 된 건 2015년 무렵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대기오염 문제가 심각해지면서다. 환경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시기에 책을 출판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한국어가 유창한 그에게 그간의 강연 녹취록과 평소 생각을 바탕으로 글을 정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언젠가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책을 쓰는 부담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국제삼림관리협의회(FSC) 인증을 받은 친환경 책을 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타일러는 “가능하면 친환경 방식으로 책을 내고 싶었다”면서 “그런 이야길 출판사에 했더니 ‘국내엔 가능한 인쇄소가 없다’고 하더라. 찾아보니 식물성 잉크를 사용해 FSC 인증 도서를 만들고는 있지만 대부분 수출용이고 국내 수요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시장에서 크게 인지하지 못하니까 친환경 방식으로 인쇄하지 않고 저렴한 방식으로 한다는 게 비겁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친환경적인 책을 통해 환경 문제를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고 돌이켰다.

기후위기를 막고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뭘까. 타일러는 “각 개인이 분리수거를 하고 일상 속 습관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규모 있는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인이 생활습관을 싹 바꾼다고 해도 전체적인 이산화탄소배출량 감소 측면에선 통계학적으로 0이나 마찬가지”라며 “내가 집에서 혼자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 완벽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게 낫다”고 부연했다. 정부와 기업이 환경 문제에 앞장서고 시민들이 거기에 가치를 부여해야만 유의미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타일러는 “그런 의미에서 친환경적으로 물건을 만드는 기업의 제품 구매하기, 후보들의 기후정책 살펴보고 투표하기, 환경을 위해 자신이 하는 일을 주변에 알리기 등 세 가지는 꼭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환경에 대한 소신 때문에 소고기보단 닭고기를 먹는다. 배달음식도 잘 시켜 먹지 않는다. 자동차 광고 모델 제안을 거절한 적도 있다. 전기자동차라면 어떨까. 타일러는 “화석 연료 사용을 중단하기 위해선 전기차 인프라를 확대해야 한다”며 “전기차 구매를 장려하고 수요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긍정적이지만, 면허부터 따야 한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얼마 전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합격해 기능시험을 앞두고 있다.

2014년 JTBC 예능 ‘비정상회담’ 미국 대표로 출연하면서부터 타일러는 뛰어난 언어 능력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는 “어떤 주제로 강연해도 언어공부법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며 웃었다. 자연스레 언어학습 비법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언어는 공부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타일러는 “언어는 몸에 배야 한다”면서 “불편함을 깨닫는 순간이 많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환경 설정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해당 언어를 쓰는 나라에 가지 않더라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언어나 시청하는 방송,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등 플랫폼의 설정을 익히고 싶은 언어로 바꾸는 방법을 추천했다.

한국에 산 지 벌써 11년이 됐다. 인생의 3분의 1이 넘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낸 셈이다. 영주권도 취득했다. 고교 시절 한국인 유학생이 화이트보드에 끄적인 글자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배우기 시작한 한국어는 모국어 수준이 됐다.

그는 “영어나 유럽어와 차이가 큰 게 관심을 끌었다. 안 보이던 세상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매력을 느꼈다”면서 “당시엔 미국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가서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한국에서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한국 정부 초청 장학금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한국 땅에 발을 디딘 2011년과 비교하면 지금은 길에서 외국인을 마주치는 일이 일상이 됐다. 타일러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외국인도 늘었다. 하지만 팬데믹은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퇴보시켰다고 그는 꼬집었다.

타일러는 “코로나 이후 식당에서 두 번 쫓겨났다. 외국인이라며 얼굴을 보자마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면서 “법적인 근거를 들어 ‘이건 차별이다’라고 얘기했더니 들여보내 줬다”고 말했다. 외국인 중에 코로나19 감염자가 많다는 얘기에 병원에서 진료를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배우고 일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일’이 그에겐 큰 보람이자 즐거움이다. 타일러는 “다른 문화,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거나 체험하지 못한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관점을 소개하고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 즐겁다”면서 “방송에서 한국 사람들이 눈치 보느라 못하는 얘길 자유롭게 하거나, 암기가 아닌 활용 위주의 영어 학습법을 강의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언어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일은 제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평생 한국에서 살 계획이냐는 질문에는 긍정적으로 답하지 못했다. 그는 “대한민국은 출신지나 언어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가족을 꾸리고 평생 살겠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며 “지금은 한국인과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는 현실이지만, 평생 살겠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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