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트레이닝복, 청청패션, 골반바지, 배꼽티, 벨리체인, 카고팬츠, 통굽 신발, 두건.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패리스 힐튼, 비욘세 등으로 대표되는 2000년대 미국의 하이틴 스타들이 즐겨 입던 패션 아이템이다. 이게 다시 뜨고 있다. 3040세대에겐 ‘흑역사’로 여겨지던 패션이지만, 그룹 블랙핑크 멤버 제니가 입는 ‘힙(hip)’한 패션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패션업계는 올해 트렌드 중 하나로 ‘Y2K 패션’을 꼽는다. Y2K는 ‘Year 2000’의 줄임말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유행하던 패션을 지칭한다. 1999년 전 세계를 불안에 떨게 한 컴퓨터 연도 인식오류 ‘밀레니엄 버그’와도 이름이 같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어디서든 입기 편한 원마일웨어, 라운지웨어가 주목받았다면 올해는 과감하게 신체를 드러낸 화려한 ‘세기말 패션’이 여성 패션시장을 강타하는 것이다.
기장이 더욱 짧아진 크롭톱(배꼽티), 밑위가 짧아 골반에 걸쳐 입는 로우라이즈 팬츠, 미니스커트 등이 대표적이다. 가죽 재킷과 카고바지도 Y2K 패션을 대변한다. 1020세대 고객 비중이 높은 패션 플랫폼 지그재그의 지난해 상반기 검색량을 봐도 로우라이즈 검색량이 전년보다 20배(1949%)나 늘었다. 베레모와 니삭스 검색량 역시 각각 454%, 396% 증가했다. 최근까지 ‘다시 돌아와서는 안 될 유행’으로 꼽히던 패션이 Z세대에게는 트렌디한 스타일로 인식되면서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패션은 돌고 돈다는 말을 증명하듯이 지난해부터 Y2K 트렌드가 급부상했다. 과거를 경험했던 이들에게는 추억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함으로 다가오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새천년을 앞둔 당시와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현재 상황이 비슷하다는 점도 Y2K패션을 주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또 다른 패션업계 관계자는 “1990년대 말은 불안하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2000년 이후에 대한 기대감이 공존했던 시기”라며 “지금도 2년 동안 코로나19로 불안을 느끼고 있지만, 코로나19 이후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당시 패션으로 심리적 안정을 받으려는 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올해 봄·여름(SS) 시즌 컬렉션에서도 Y2K 패션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미우미우는 미니스커트에 니트 크롭톱을 선보였다. 하의 허리선은 골반까지 내려왔고 상의 기장은 명치까지 짧아지면서 배가 훤히 드러났다. Y2K 패션을 선도하고 있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블루마린은 통 넓은 로우라이즈 팬츠에 나비 장식이 달린 왕벨트를 선보였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은 맨살을 드러낸 허리에 주얼리 장식을 두르는 벨리체인에 속옷을 치마 위로 레이어드한 스타일을,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돌체앤가바나는 가죽재킷과 카고팬츠, 코르셋 등을 런웨이에 세웠다.
한국 패션 플랫폼 W컨셉이 한 시즌 앞서 신상품을 공개하는 ‘쇼윈도우 기획전’을 살펴봐도 40여개 참여 브랜드에서 데님 소재, 꽃무늬 프린팅, 특정 부분을 잘라낸 컷아웃 디자인 등을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구호플러스와 에잇세컨즈도 가죽자켓, 청자켓, 미니스커트, 크롭톱 같은 레트로 아이템을 재해석해 선보였다.
이런 트렌드에 힘입어 잊혔던 1세대 브랜드들은 부활에 성공했다. 대표적인 게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다. 1990년대 X세대를 사로잡았던 브랜드인데, 최근 하이엔드 캐주얼 웨어를 표방하며 MZ세대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국내 패션업체 레이어가 ‘마리떼’라는 이름으로 2019년 재런칭한지 1년 만에 100억원대 브랜드로 성장했다. W컨셉이 지난해 새롭게 주목받는 ‘10대 루키 브랜드’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서울 한남동에 플래그십스토어를 오픈하고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에도 입점했다.
리바이스, 랭글러와 함께 3대 청바지로 불렸던 ‘리(LEE)’도 2004년 이후 자취를 감췄다 지난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20년에 ‘커버낫’을 운영하는 패션업체 배럴즈가 미국 VF코포레이션으로부터 판권을 사왔다. 브랜드 로고를 크게 디자인한 제품이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패션 플랫폼 무신사 판매랭킹 10위권에 진입했다. 무신사 라이스커머스 방송을 통해 한 시간 만에 매출 1억5000만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돛무늬 바람막이로 유명한 ‘노티카’는 지난해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온라인 전용 브랜드로 재탄생했다. 1990년대 ‘프레피(미국 명문 사립 고등학교 교복 스타일) 룩’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1992년 노티카를 국내에 들여왔던 영창실업은 2007년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업을 정리했다. 이후 2009년, 2012년 두 차례 재개시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지난해 신세계인터내셔날이 다시 시장에 내놓은 후 목표 매출을 100% 이상 달성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뒷주머니의 말발굽 자수가 특징인 ‘트루릴리젼’도 지난해 4년만에 재론칭했다. 송승헌, 소지섭, 김하늘 등 톱스타들을 발굴했던 ‘스톰’도 24년 만에 돌아왔다. 지난해 패션업체 에스제이트렌드가 영국 스톰 런던과 라이선스 체결하면서다. 연예인 모자로 불리던 ‘본더치’ 제품을 가수 선미, 설현 등이 입으면서 MZ세대에게 주목받고 있다. 삼성패션연구소는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패션계가 잊힌 옛 브랜드에 주목하고 있다. 가까운 과거에서 가져온 익숙한 것들이 새로운 것으로 여겨지면서 오래된 유명 브랜드들이 ‘K-라이선스 브랜드’로 다시 등장했다”고 분석했다.
정신영 기자 spirit@kmib.co.kr